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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사람들의 역사를 얻다

내가 쓰지 않으면

일기는 대신 써줄 사람이 없습니다. 


유명인들에 대한 일대기를 쓰는 자서전 작가들이 있다지만, 그들 또한 당사자의 깊은 내면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기억의 불완전함을 떠올려본다면, 내가 쓰지 않으면 영영 유실될 역사는 마음속에도, 일상 속에도 매일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일기 쓰기는 글이란 결과물을 산출해 내야 하는 작업이 아니라 '내 역사를 얻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오직 나만이 얻어낼 수 있는 기록이 일기입니다. 


역사와 정체성

어떤 나라든 공들여 역사책을 만드는 것을 보면 '역사를 얻는 것'의 가치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쓸모가 무엇인지 좀 더 선명하게 그려보려면 역사책이 없는 나라를 상상해 보면 됩니다. 사람들끼리 기억에 차이가 나거나 아예 기억 못 하는 것도 있을 테니 각자의 역사 이야기가 아주 중구난방일 것입니다. 이가 빠진 곳 사이사이에는 누구의 어떤 상상이 채워질지 모를 일입니다. 아예 없던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도적인 거짓을 '역사왜곡'이라고 부릅니다. 기록하지 않은 채로 계속 시간이 흐를수록 더 혼란스럽겠죠. 


역사왜곡과 통제

그러다 보면 '대체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인가'라는 국가적 정체성은 일관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목소리 크고 힘센 사람이 모인 집단이 말하는 역사가 주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사가 진실이 아닌 권력 아래 이런저런 모양새로 주물러지는 것이죠. 조지 오웰의 [1984]란 소설을 보면 그런 힘을 손에 쥔 권력집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기록을 조작함으로서 주도면밀하게 기록의 힘을 악용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사람들이 일기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이 과거의 이런저런 사건에 대해 손을 쓰면, ‘그 일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것이야말로 고문이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당은, 오세아니아는 한 번도 유라시아와 동맹을 맺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자신, 윈스턴 스미스는 오세아니가 불과 4년 전만 해도 유라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의식에서나 존재할 뿐이었으며, 그 의식은 어쨌든 조만간 소멸되고 말 터였다. 그리고 만일 다른 모든 사람이 당이 밀어붙이는 그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기록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의 일부가 되고 진실이 된다. 당은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하며,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중략) 일기를 쓰려는 것이 바로 그가 지금 하려는 일이었다. 그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법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이 일이 들키게 될 경우 사형이나, 최소 강제 노동 수용소 25년 형이라는 처벌을 받을 것이 거의 확실했다.

조지오웰
1984


불법을 불법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불법의 개념'자체를 기록에서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부당한 법이란 인식을 없애기 위해 아예 법 자체를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소설 속 독재권력은 일기를 왜 이렇게 경계했을까요? 일기는 진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이 계속해서 바꾸는 말과 기록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민들의 진솔한 일기입니다. 진솔한 일기를 쓰다보면 거짓말하는 상대의 말과 기록에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은 위험을 무릎쓰고 결국 일기를 쓰게 되고 점점 진실의 역사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에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소설의 끝은 비극적입니다. 결국 거짓역사를 강제하는 거대한 사회의 폭압 앞에 한낱 개인인 윈스턴은 굴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품은 기록을 가진 이들이 윈스턴 말고도 수십명, 수백명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이 힘을 합쳤다면 어땠을까요. 조지 오웰은 그런 비극적 끝맺음을 통해 독자들에게 독재권력과 거짓역사의 힘에 대한 경각심을 더 자극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최대한 다수가 진실에 깨어있고 또 그것을 변치 않는 기록으로 간직하도록 말입니다. 


나의 역사왜곡과 역사누락

개인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만큼 복잡하고 길지 않기 때문에 굳이 기록할 필요 없이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예전 일기를 다시 읽다보면 '이건 기록 안 했으면 분명 잊었을 거야'라고 할만한 순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바쁘고 정신없을 때 겪은 일이나 전개가 꽤 복잡한 사건들은 그냥 기억 속에만 두면 금방 그 전말이 뒤죽박죽이 되기도 합니다. 신선한 과일을 얼른 냉장보관하지 않으면 쉽게 썩어버리듯 우리의 기억도 여기저기 상해버리기 전에 얼른 기록의 냉동고에 넣어줘야 합니다. 


일기와 역사책은 이렇게 기억 속에서 흐트러지는 과거를 기록으로 바로 잡아 고정시켜 주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정체성을 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기록마저도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완벽할 수는 없지만 얼른 쓰면 시간의 열기가 기억을 부패시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원래 상태 그대로 냉동박제해 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흔히 쓰는 표현인 '타이밍'은 일기 쓸 때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시간이란 강물에 떠내려가는 기억을 잘 낚아채기 위해서는 때론 타이밍이 전부입니다. 


홀로 쓰는 일기지만 의도적인 역사왜곡의 위험도 없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능력의 한계로 인해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것은 비의도적인 역사누락 또는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의 욕망, 자존감, 불안감 등으로 인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누락하는 것은 좀 더 의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 마음속에 [1984] 속 오세아니아의 독재당처럼 어떤 한 욕망이 매우 강력한 권력을 차지하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양심을 따라 진솔한 기록을 하려는 마음을 지켜내야 마음속 윈스턴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시간과 정체성

나의 역사는 곧 나의 정체성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역사를 일기에 선명하게 기록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해 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체성의 선명도에 정확도를 더하고 싶다면 나 자신의 역사누락과 왜곡을 주의해야 합니다. 누락과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신속하게 쓰는 것 그리고 솔직하게 쓰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현재의 정체성이 완전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미래 경험이 더해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역사가적 시각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정체성을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끝없는 역사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허버트 카
<역사란 무엇인가>


나와 너의 역사

일기가 나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만들어준다고 해서 꼭 '나의 이야기'만 담는 기록은 아닙니다. 일기는 자유로운 기록입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사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나의 직간접적 경험이란 테두리 내에서 어떤 주제에든 다가갈 수 있습니다. 나의 역사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역사, 사회의 역사도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일기는 자신에게만 몰두하게 만드는 자기중심적인 기록이 아닙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역사, 사회의 역사에도 관심의 불씨를 지펴줄 수 있는 기록입니다. '자기 돌봄'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일기는 '타인 돌봄'을 위한 기록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의 경우 22년 전부터 일기를 써오다 보니 10년 전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레 아이들에 대한 일기도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성격이나 행동에 대해 쓰다 보니 어린이집이나 병원에서 평소 아이가 어떤지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어 일기의 쓸모를 체감했던 기억들이 꽤 많습니다. 


저의 일기장에는 아이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연애시절 아내와의 이야기 그리고 대학교와 직장생활 때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들도 많이 쌓여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만났던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님, 친인척, 연인, 친구, 선생님, 직장동료 등 생각보다 많은 인연을 만났고 헤어졌고 또 이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남은 서로의 역사가 얽히는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역사를 직접 관찰할 수 있고 또 때로는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일기에는 타인의 역사를 위한 자리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상의 역사

당연한 듯 항상 만나는 사람들과의 에피소드, 매일 반복하는 일상활동과 평범한 사건들로 채워진 일상은 왠지 기록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완전히 틀린 직관은 아닙니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일기와 역사의 대원칙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복이 만들어내는 당연함은 사소함과 소중함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반복은 소중한 것마저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결국 일상풍경의 배경 중 하나로 녹여버립니다. 사소해서 잊힌 것들과 나란히 서게 돼버리는 것입니다. 잊힌 일상의 소중한 장면이 사건사고로 배경에서 떨어져 나갈 때에야 따끔하며 그것을 다시 의식하게 됩니다. 


그전에, 평소에 그 소중함을 되새기는데 일기가 유용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19년에 썼던 저의 실제 일기를 보여드리며 좀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제 일기장에 스캔되어 있는 당시 일기장 입니다.


"일상을 당연시하지 마라" **이(첫째)가 팔이 부러져 응급차에 실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일상이 부서졌다. 순식간이었다. 책도 일도 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 **(첫째)랑 신나게 뒹굴고 영상 때문에 훈계하고 했을 일상의 저녁이 순식간에 뒤바뀐 이 날. 뭐든 당연히 여기지 마라. 모두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 

19년 11월 12일 화요일


세세하게 뜯어보고 싶은 경험은 이렇게 그래프 일기를 쓰기도 합니다. 그래프의 오른쪽에 있을수록 좋은 일이고 왼쪽에 있을수록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프가 음의 방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며 일상이 뒤집히는 순간이 눈에 쉽게 띕니다. 비일상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올 때에야 이렇게 일상의 소중한 장면이 배경에서 다시금 툭 솟아오릅니다. 반복되어 당연하게 여기던 소중한 장면들이 그제야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냅니다. 


좀 더 최근엔 이런 일기를 쓴 적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안에 손에 꼽는 힘든 일을  겪은 후) 평화모드로 진입하면 일기의 양이 툭 줄어든다. 상황 묘사도 힘들 때만큼 세세하지 않다. 이런 평화로운 상태를 일으키는 원인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심한 독감 후 쉬는 날). 아이들은 평화롭게 영상 보고 게임하고, 나는 약 먹고 낮잠도 자고... 아무런 심적 어려움 없이 회복하는데 집중할 수 있는 하루였다. 그러자 일기에 쓰일 것이 별로 없다. 대체 왜인가? 왜 나는 이런 고마운, 정말 감사한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쓰지 않는가? 상당히 불공평하다. 고통의 시기에는 그렇게도 자세하게 그 고통을 들여다보고 원인을 찾아내려고 온갖 기억을 다 소환하더니? 그것 참 신기하다.

일상의 행복이란 걸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해 보고 싶다. 아니, 일상의 행복이란 것은 내가 그 속에 있을 때는 의식되지 않는다. 그저 일상의 면면들을 자세히 기록해 보자. 아이들과의 대화를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자세히 써보자. 그리고 대체 어떻게 그런 평화의 순간들이 매 순간 이렇게 내 삶에 잘 도착하는지 잘 살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자.

23년 7월 7일 금요일


그렇다고 1분 1초 단위로 매 순간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반복되는 일상이라도 세세하게 써보겠다는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묵직한 사건을 선별해서 담는 엄숙한 역사책과는 다르게 일기는 당연한 일상의 역사들도 담을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소탈한 기록의 그릇이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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