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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꽃을 피워내다

삶을 견뎌낸 사람들은 누구나 할 이야기가 있다. 

메리 카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꽃을 피우는 뿌리

일기를 솔직하게 쓰려면 나만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기장의 그 어떤 이야기도 밖으로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자기 일상이란 토양 깊숙이 뿌리내린 일기는 때로 자신만의 향기를 가진 꽃 같은 글을 피워내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길 가던 사람들도 멈춰 서서 음미할 정도로 탁월하면서도 독특한 향이 밴 글꽃도 있습니다. 잘 다듬어서 세상에 내보내야 할 글입니다. 이곳 브런치스토리에서도 그렇게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잘 다듬어진 글꽃다발들이 흐드러져 있습니다. 


물론 일기를 쓰는 모두에게 보장되는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진정성과 차별성을 갖춘 글감을 찾기 좋은 밭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서점에 '일기를 에세이로'란 이름의 책들이 꽤 보이는 것 또한 이를 뒷받침합니다. 


(내면생활이 담긴 일기는) 제삼자도 읽을 맛이 있다. 맛만이 아니라 이 일기의 주인과 함께 수양됨이 있다. 내면생활의 기록은 훌륭히 문학에 접근할 뿐 아니라 내면생활이 풍부한 사상가나 예술가들은 일기가 그들의 작품만 못하지 않게 예술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태준
<문장강화>


글 꽃꽂이

일기장에서 향기로운 글꽃을 발견했고 세상에 내놓을만하다는 판단이 섰다면 이제 꽃꽂이를 해야 합니다. 꽃집에 가보면 여러 꽃들이 보기 좋게 꽃꽂이되어 있습니다. 정성을 들여 이렇게 다듬을 때 꽃의 진가는 더욱 잘 드러나게 됩니다. 한눈에 지나가는 사람을 사로잡고 다가온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향기로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듭니다. 나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남도 즐기게 하려면 이런 꽃꽂이 작업이 필요합니다. 


꽃꽂이를 시작할 때 이 꽃이 누구에게 매력적 일지, 누구에게 필요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보통 꽃은 입학과 졸업, 승진, 결혼 등 주로 좋은 일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슬픈 일에도 꽃이 함께하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의 누구에게 전하는 꽃일지 고민해서 선택하고 배치하며 다듬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글과 꽃은 새삼 서로 닮은 점이 꽤 많아 보입니다. 


대중과 공유할 이야기

'세상에 내놓을 글'이라고 하면 보통 대중이 그 대상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런 ‘대중성 있는 꽃'은 조심스레 잘 관리하며 키워나가야 합니다. 아마 꽃의 종류에 따라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겠죠. 꽃꽂이를 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드는 시기가 오면 따로 분리시켜 본격적으로 다듬기 시작해야 합니다. SNS업로드, 응모전 또는 출판사 투고, 대중강연 등 대중에 가닿을 경로의 특징에 잘 맞는 형태로 다듬어 가야 합니다. 큰 출판사에 선택받아 서점 가판대에 바로 올려지는 글꽃다발이 있는가 하면 마치 길거리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온 강인한 야생화 같은, 다듬지도 않은 SNS의 공개일기가 그곳에서 그대로 데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글꽃들이 대중의 눈길에 닿아 생존하고 만개하는 경로는 가지각색입니다.


저의 이 책도 22년간 일기를 쓰던 일상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과연 마르지 않고 여러분의 손에 잘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오늘도 어쨌거나 이 글꽃을 다듬고 또 다듬고 있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자신이 살아낸 인생 이야기 자체를 에세이 형태로 다듬어 내어놓기도 합니다. '일상의 토양에서 자란 글꽃'의 정확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젠 인공지능이 온갖 지식을 섭렵해 인간을 가르칠 수 있는 지경에 이르고 있지만(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되겠지만), 한 개인의 진정성 있는 경험담이란 정보 또는 지식은 여전히 인간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체험적 지식으로 자신만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챗봇에게 실화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보라고 하면 마치 자신이 인간인양 경험한 것들을 매우 그럴듯하게 꾸며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서 자기 경험을 증언하지는 못합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취약한 존재로서의 경험을 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기쁨과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그럴듯하게 흉내 낼뿐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의 진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육체와 마음 그리고 생명체로써의 삶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일기에 대해 이태준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이 참 와닿습니다. 일기에 진솔하게 기록하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에는 작가님이 말하는 '절실미'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기에서 건져 올려 오늘도 다듬는 글꽃들에는 절실미라는 은은한 향이 스며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누구에게 있어서나 생활처럼 절실한 것은 없다. 절실한 생활이니까 생활에서 얻는 감상은 모두 절실하다. 공연히 꾸밀 필요가 없다. 돌을 다듬으면 오히려 돌의 무게가 없어 보이듯, 워낙 자체가 절실한 것을 수식하다가는 도리어 절실미(切實味)를 죽인다. 문득 깨닫고 느껴짐을 솔직히만 적을 것이다.

이태준
<문장강화>


지인과 공유할 이야기

일기에서 대중에게 받칠 꽃만 찾다 보면 주위 사람들에게 줄 꽃은 놓칠지도 모릅니다. 사실 대중에 큰 인기를 얻는 글꽃들은 네잎클로버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그보다는 평범한 세잎클로버들도 잘 엮어서 이쁘게 만들면 주위 사람들에게 줄 멋진 꽃다발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인에게 줄 것들에는 글꽃뿐만 아니라 말꽃의 형태도 흔할 것입니다. 


요즘 저희 집에 10세 첫째와 7세 둘째가 부쩍 다툽니다. 그렇게 우애가 좋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충돌합니다. 가끔은 막 소리도 지릅니다. 둘 중 한 명은 바닥에 누워서 울기도 하고요(그럼 나머지 한 명은 귀를 막고 웁니다). 특히 몇 번이고 가르치고 중재했지만 비슷한 이유로 계속 반복된 다툼이나 고집부리기 라면 슬슬 화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몸과 정신마저도 지쳐있을 때는 억누르던 분노가 불같이 확 솟구쳐 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 불이 혀끝까지 타고 올라오면 말꽃이 시커멓게 타버리고 결국 저도 언성을 높이며 말이 아닌 불꽃을 내뿜습니다. 


어떻게 상황을 넘긴 후 일기를 쓰다 보면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한숨이 푹 나옵니다. 그중에는 '아 그때 내가 그렇게 화 내버리는 게 아니었는데'란 자책의 숨이 섞여있을 때도 꽤 많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지,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도 함께 기록해 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전해줄 말꽃을 다듬는 것입니다. 


상황이 종료되어도 여전히 마음바닥이 뜨끈뜨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일기를 쓰며 상황을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찬물을 끼얹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전 작업을 해두면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났을 때 순간의 감정에 덜 휘둘릴 수 있었던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기를 쓰며 경험담을 잘 갈무리해 두면 주위 사람에게 조언을 건네야 할 때나 공감적인 경청을 할 때도 상당히 유용합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잘 정리한 상태로 말해줄 수 있을 것이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에는 더욱 공감하며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일기는 일기로

이렇게 일기가 피워내는 글꽃과 말꽃의 향기로움을 몇 번 경험하다 보면 일기가 삶에 더 단단히 자리 잡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기의 쓸모, 일기 쓰기의 보상을 맛본 것이죠. 


하지만 이 시점에서 주의할 점은 일기는 일기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들에게 공개할 만한 것들'만' 골라 일기를 쓰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절실미를 품은 생화는 멋대로 피어나도록 두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 저의 제안입니다. 가끔 오르는 저희 집 뒷산에는 나무와 꽃들이 이곳저곳에 멋대로 피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산에 나무와 꽃이 구역을 나뉘어 칼로 잰 듯 일렬로 정렬되어 있다면 어떤 느낌인가요? 저는 왠지 소름이 돋습니다. 그런 각 잡힌 자연은 공원에서 즐기면 됩니다. 뒷산은 뒷산으로 둬야 합니다. 


이 일기를 나중에 세상에 내놓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이미 타인의 시선이 저의 손가락을 옭아 메기 시작합니다. 솔직하게 쓰기에 멈칫거려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도 미묘하게 바뀝니다. 말투도 바뀌고요. 아무도 없는 '자기만의 방'에서 혼자 쓰는 줄 알았는데 문득 어깨 너머로 시선이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공포영화도 아니고 말입니다). 실제로 내 옆에는 아무도 없지만 미래에 이 기록을 보게 될 타인의 시선들을 현재로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일기는 나만 보는 것으로 계속 써나가야 가상의 시선에서 해방됩니다. 


고독과 만남의 순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시선'은 언제나 배척해야 할 악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보통 우리네 삶은 혼자 있는 시간과 다른 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순환됩니다. 말하자면 인생은 고독과 만남의 순환입니다. 이처럼 나만의 솔직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과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순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만의 방을 나서야 더 큰 세상을 보며 나의 시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수많은 시선들로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뭉개져버린 나만의 시야는 자기만의 방에 돌아와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시선을 받는 글도 써보고 시선에 관계없는 일기도 써보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나 자신과 주위사람들에게 또는 어쩌면 세상에게 내놓을 좋은 글꽃과 말꽃이 여러분의 일기의 밭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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