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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노트로 시간표식 일기 쓰기

이번 장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시간표식 일기를 종이노트에 기록하는 방법을 공유할까 합니다. 저는 만년필을 좋아하는지라 때로 디지털 캘린더가 지겨우면 만년필로 일기를 쓰기도 합니다. 결국 접근성이나 효율성 때문에 곧 다시 디지털 캘린더로 돌아가기는 하지만요. 


어떤 노트에 시간표식 일기를 써야 할까?

두 가지 종류의 노트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속지 양식이 인쇄된 상태로 판매되는 '플래너'류의 노트들입니다. 양식이 있는 노트로 시간표식 일기를 쓰시려면 주로 데일리 Daily라고 부르는 일일 시간표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플래너 양식의 노트


일기캘린더 내용을 종이노트로 옮긴 모습입니다. 이런 양식노트의 장점은 날짜나 시간을 일일이 쓸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월별 계획표도 함께 따라오는데, 여기는 월별 중요사건만 요약기록하기 좋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저도 '월별 중요사건' 시트를 따로 작성하고 있는데 이런 양식이 있는 종이노트는 내용을 바로 쓰기만 하면 완성됩니다. 


양식노트의 단점은 공간이 한정적이란 점입니다. 날짜별로 공간이 다 정해져 있어서 쓸 것이 더 있다고 다음장에 기록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포스트잇을 덧붙여 쓰는 방법도 있지만 아무래도 한눈에 다 안 읽히고 종이를 뒤적거려야 해서 조금 귀찮아집니다. 만약 일기와 일정을 함께 쓰겠다고 하면 공간이 더 부족해지기 때문에 함께 기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빈칸 격자노트

대안으로 빈칸노트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빈칸노트들도 나름의 양식이 있는데 밑줄 Lined, 격자 Grid, 점 격자 Dotted 등이 있습니다. 아예 아무 양식이 없는 무선양식도 있고요. 제가 추천드리는 빈칸노트 양식은 격자 양식입니다. '불렛저널'에 익숙하신 분들은 격자 점 양식도 괜찮습니다. 

악필이지만 만년필을 좋아합니다.


빈칸노트는 날짜나 시간을 일일이 써야 하는 등 손글씨 노동이 좀 더 필요하지만 대신 기록의 양이 늘어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다음장으로 넘어가면 되니까요. 일기 쓸 거리가 별로 없는 날은 공간도 아낄 수도 있습니다. 


격자 1칸을 1시간으로 설정했을 때 또는 30분으로 설정했을 때

격자 1칸을 30분으로 설정하면 공간을 늘릴 수도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좀 더 여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시간막대를 좀 더 상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점도 장점입니다. 물론 노트는 2배 더 빨리 소모하겠지만요. (문구덕후분들에게 장점일지도요!) 저처럼 만년필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만 해도 즐거우신 분들에게는 더욱 추천할만한 방식입니다.


필기도구 추천

만년필 덕후인지라 필기도구 추천을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혹시 아직 만년필을 사용해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만년필 한번 써보시기를 추천드려 봅니다. 만년필이라고 하면 왠지 사치재인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저도 학생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주 들리던 서점에 가면 항상 멋진 만년필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때의 속마음은 이랬습니다. 


'아니, 볼펜이랑 가격차이가 왜 몇 배씩이나 나는 거지?'

'볼펜보다 쓰기도 불편하고 관리도 해줘야 하는데...' 


그랬습니다만, 또 한편으론 서점에 들를 때마다 괜히 그 앞을 서성이곤 했습니다. 그러다 직장을 다니면서 월급은 받기 시작할 때쯤, 입 싹 닦고 '한번 써볼까?'란 순간의 충동에 제일 저렴하다고 생각하는 만년필을 샀습니다. 몇 배의 가격 차이 정돈 아니라며, 사치재가 아니라며 일종이 합리화를 시도한 것이죠. 대략 2만원 정도 하는 펜이었는데 그것도 좀 덜덜 대며 구입했습니다. 마침 당시 직장도 매일 펜을 써야 하는 곳이어서 첫 직장 6년간 정말 만년필을 실컷 썼습니다. 그 길로 만년필의 늪에 발이 담겨버린 거죠.


시각, 청각 그리고 촉각적인 즐거움

지금은 가끔 볼펜을 쓰면 꽉 쥐어 그어야 하는 무딘 필감에 기분이 팍 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일단 만년필은 손에 힘이 덜 들고 볼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각거리는 필감이 쓸 때마다 감각적인 즐거움을 줍니다. 청각과 촉각적인 자극이죠. 일반 펜과는 차별화되는 디자인도 강력한 매력 포인트입니다. 잉크색도 미묘하고 다채로워 색놀이를 하기도 좋습니다. 어릴 때 12색, 24색 색연필, 물감세트를 갖고 놀 때 느꼈던 순진한 설렘을 다시 느껴볼 수 있다랄까요. 저는 파란색을 좋아해서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5개의 파랑 잉크병이 책상 위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파란색이 다 같은 파란색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쌓여버렸습니다.


사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볼펜이 훨씬 낫다는 말에 반박 못합니다. 잉크관리를 해주지 않아도 되고 힘줘서 막 써도 펜촉이 휠 염려도 없습니다. 잉크는 잘 지워지지 않고 변색도 덜 할 것입니다. 디자인적인 면에서도 최근 좀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모나미 Monami라는 국민 브랜드가 수년 전부터 부쩍 지나치기 힘든 예쁜 볼펜들을 좋은 가격대에 내놓고 있습니다. 저도 몇 개 있습니다. 해외 유명 만년필 브랜드들 중에는 만년필과 볼펜을 항상 쌍으로 출시하는 곳도 꽤 있고요. 


가성비 브랜드

대략 10년 정도 만년필 생활을 하며 여러 가격대의 다양한 펜 브랜드를 거쳤고 분양 보낸 것도 많습니다(네, 만년필 애호가 분들은 쓰던 펜을 중고판매하는 것을 '분양'한다고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질 좋은 가성비 브랜드를 즐기자'라고 저 자신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모순적인 '소소한 사치'를 가능하게 해 주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브랜드 몇 곳 소개해드리자면 독일의 라미 Lamy와 대만의 트위스비 TWSBI 그리고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오피시아나 Leonardo Officiana 정도입니다. 앞의 2개 브랜드는 2-8만원 정도면 준수한 펜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매장 가격 차이가 꽤 나는 경우도 있어서 검색은 필수입니다. 게다가 수도권의 만년필 전문매장이 아니라면 트위스비나 레오나르도 브랜드들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보기 힘들 겁니다. 라미는 너무 잘 알려져 있어 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최근 저는 특히 트위스비 펜들의 마감이 가격대비 아주 훌륭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트위스비는 만년필 애호가들이 데몬스트레이터 펜 Demonstrator Pen이라고 부르는 투명 몸통의 펜들을 많이 내놓습니다. 


(왼쪽)요즘 항상 주머니에 들어 있는 TWSBI사의 트위스비 에코 브론즈 블루 만년필. 잉크 넣기 전. (오른쪽) 블루 투명 버전의 에코와 함께.

개인적으로 라미와 트위스비는 정말 '동서양의 가성비 만년필 양대 산맥'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입니다. 레오나르도의 입문기들은 10 - 20만원 사이여서 완전 가성비라고 보긴 힘들지만, 만년필 세계의 전체 스펙트럼에서는 중저가(!) 정도의 위치입니다. 그리고 그 가격대에서 그 정도의 디자인과 마감은 아주 훌륭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가격대에서는 유명한 일본 만년필 3 사인 세일러 Sailor, 플래티넘 Platinum, 파이로트 Pilot 가 강력한 모델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쉽게도 요즘 저의 취향이 아니어서 언급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좀 더 전통적인 만년필 디자인을 선호하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선택지가 될 겁니다. 


자기 전에 만년필로 소설필사를 하고 메모를 남기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Leonardo Officiana의 모멘토제로2.0 스타더스트


만년필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필감도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도 취향의 영역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라미 사파리 만년필의 연필처럼 사각이는 필감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펜촉이 사각거리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서 제가 쓰는 펜들은 모두 사각거리게(!) 만들어놓기도 했습니다. 


종이의 세계

만년필을 쓰시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제 종이의 세계에도 발을 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년필의 잉크를 견딜 수 있는 종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잉크를 못 견디는 신호로는 종이 위의 잉크가 잔가지처럼 퍼지거나 종이 뒷장에 잉크가 스며 나오는 뒷비침 현상이 있습니다. 예로 몰스킨 노트 Molskin는 정말 멋지지만 종이가 잉크를 버티지 못해 뒷비침이 심합니다. 너무 아쉬운데, 최근 독일의 카웨(베)코 Kaweco 만년필과 협업을 하는 것을 보니 곧 개선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이미 개선이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로이텀 Leuchtturm이나 라미 Lamy의 노트들은 만년필 잉크를 잘 견디는 대표적인 브랜드입니다. 라미는 아무래도 만년필 회사다 보니 특히 잉크 비침에 신경을 쓴 티가 났습니다. 일본의 토모에리버 Tomoeriver 종이나 미도리 Midori 노트도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 유명합니다. 국내 노트사 중에는 오롬 OROM이 최근 만년필 사용자들을 고려한 제품을 꽤 내놓는 듯합니다. 만년필 가죽 케이스 및 만년필 잉크를 고려한 노트들이 꽤 보입니다. 방금 검색해 보니 토모에리버 종이로 노트도 만들었네요. 


최근엔 디지털 일기장을 쓰는지라 예전만큼 종이노트를 자주 사용하진 않지만, 여전히 필사와 문장표현 공부 등에는 적극활용하는 편입니다. 너무 빨리 입력하는 키보드보단 손글씨로 느긋하게 음미하며 쓰는 것이 표현력 흡수에 더 좋다고 느꼈습니다. 게다가 쓰는 행위 자체가 감각적인 재미를 주다 보니 노트를 한 번이라도 더 펼쳐 공부하게 해주는 쓸모도 있었습니다. 


*염료잉크와 안료잉크
만년필로 쓴 일기를 10년, 20년 이상 장기보관할 예정이시라면 안료잉크란 걸 고려해 보시길 바랍니다. 일반 염료잉크들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고 하는군요. 저는 항상 염료잉크만 사용해 왔고 10년 가까이 된 저의 만년필 일기장을 보면 아직 그리 희미해지진 않은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다만 안료잉크는 굳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쓰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 때는 만년필을 세척해줘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이 둘은 각각 장단점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꼭 '염료잉크와 안료잉크'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저처럼 종이 일기장을 스캔할 예정이시라면 다채로운 염료잉크를 마음껏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종이노트 PDF 스캔하기

종이 일기장을 PDF 일기장으로 만들고 싶으신 분 또는 디지털 일기장을 쓰다가 가끔 종이일기장을 쓰고 싶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팁입니다. 


종이노트를 PDF로 스캔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캐너 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1쪽씩 찍으면 마치 스캐너로 스캔된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고 PDF를 포함한 다양한 포맷으로 저장도 할 수 있습니다. 4-5장 정도 적은 양을 스캔할 때는 이 방법이 간단합니다. 


하지만 200장 정도 되는 노트 1권을 스캔해야 할 때는 스캐너 앱으로 1쪽씩 촬영하기에는 너무 번거롭습니다. 저는 이럴 때 *스캐너를 활용합니다. 제가 가진 스캐너는 한 번에 최대 50장(100쪽)까지 연속 양면스캔할 수 있어서 정말 유용합니다. 


*'북 스캐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참고로 프린터 중에도 연속스캔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프린터에 한 장씩 올려두고 스캔하는 기능은 흔하지만 이런 연속스캔 작업을 하려면 ADF(Automatic Document Feeder : 자동급지장치) 기능이 있는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장을 올려두면 알아서 연속스캔을 해줍니다. 


문제는 속지를 모두 잘라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속지작업이 끝나고 나면 일기장은 더 이상 펼쳐볼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저는 일기장을 버리지 않고 3면을 테이프로 봉인한 뒤에 서재에 꽂아둡니다. 나름 인테리어 효과도 있고 아날로그 백업보관도 되기 때문입니다. 여차하면 테이프를 떼어내고 다시 스캔할 수 있습니다. 


때로 이 일기장들을 펼쳐보고 싶다면 2공 또는 3공 펀치로 속지를 뚫은 다음 바인더에 넣어 보관할 수도 있습니다. 뚫린 부분은 못 알아보지만 한 두 글자 정도는 보통 앞뒤 맥락으로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스캔이 완료된 종이일기장들.


처음 해보신다면 익숙하지 않아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만, 스캐너가 있고 커터칼 작업에 적응했다면 한 권 정도는 15분 안에 힘들지 않게 완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과 팔을 쓰는 단순반복 작업이라 나름의 휴식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한 두권 정도의 작업량이면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속지 절단작업은 요령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책 아래 고무판을 깔고 커터칼로 속지의 가장 안쪽부터 그어서 잘라내야 합니다. 첫 절단 시에 힘을 꽉 줘서, 천천히 그어서 한 번에 3-4장 정도 자르면 좋습니다. 잘린 종이를 걷어내지 마시고 다음 절단을 위한 가이드처럼 원래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점 길이 생겨서 여러 갈래로 잘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수직으로 책 등을 뚫고 나가지 않도록 잘라나갑니다. 


*위 사진에서 내지 종이가 잘린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절단 방향이 치우쳤다면 언제든 새로 칼길을 내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절단작업이 완료되고 나면 나머지는 스캐너가 알아서 해줍니다. 책 한 권에 PDF 파일 3, 4개 정도 생성이 되는데 제가 쓰는 PDF Expert와 Foxit Reader는 미리 보기에 '페이지 모두 선택'한 상태에서 복사 한 뒤 다른 파일의 미리 보기 가장 아래에 붙여 넣기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병합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스캐너는 일기장 작업을 위해 구입한 것은 아니고 예전부터 무거운 교과서를 이런 식으로 잘라서 꾸준히 스캔을 해왔습니다*. 한 때 페이퍼리스 Paperless 개념에 꽂혀서 모조리 스캔해서 다녔었거든요.


*참고로 개인 용도로 도서를 스캔하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무단 배포는 당연히 안 되겠죠.


PDF 통합일기장을 만들고 싶지만 기존 일기장을 잘라서 스캔하는 것까지는 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PDF에 '이 부분은 종이 일기장에 있음'같은 메모를 남기시거나 일기장에서 중요한 사건만 스캐너 앱으로 촬영해서 PDF 통합일기장에 넣고 책갈피 해두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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