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보영님의 일기 : 금고보관 데스노트

[일기의 사람들 시리즈]

저번에는 알쓸인잡, 이번에는 유퀴즈다.


유퀴즈에서 내 입장에선 눈과 귀가 확 열리는 특집을 했던 적이 있다. 이름도 '너의 일기장' 특집이다. 안 볼 수 없다! 여러 일기러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에 먼저 박보영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참고 링크 : 클립 영상이 몇개 있고 영상마다 생략된 부분이 아주 약간씩 다른 듯 하다. https://youtu.be/w-5G1VeY6ok?si=hDalNaCFjBgu9zv3


"처음에는 드라마 인터뷰를 잘하고 싶어서 일기를 시작했어요. 기자분들이 에피소드를 알려달라는데 기억이 잘 안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었거든요. 하지만 점점 일기가 살생부 같다고 할만큼 슬픈 일과 화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쓰기 시작했어요. 누가 읽으면 큰 일 날 수 있는 내용들이라 일기를 금고에 보관해두고 있죠. 속으로 끙끙 앓는 편인데다가 일적인 스트레스를 누구에게 풀어놓을 수 없었어요. 혹시 부모님이 읽으시면 속상해하실 것 같기도 했구요. 그럴 때 일기를 쓰며 풀었어요. 추운날 나의 실수 때문에 스태프분들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사라지고 싶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요. 연기생활을 버티게 해준 것이 일기였어요."

배우 박보영,
유퀴즈 '너의 일기장' 특집에서
(펜메모덕후 환언 및 요약)


인터뷰를 잘하고 싶어서...

일기쓰는 사람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다들 일기를 시작하게 되는 경로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보영님은 인터뷰를 잘하고 싶어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자들이 드라마 에피소드를 물어볼 때 잘 기억해서 말해주고 싶어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연기했던 상황을 일기에 쓰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드라마의 내용 뿐만 아니라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을 것 같은데 꾸준히 일기를 쓰면 이야기 보따리를 만들 수 있겠다 싶다. 앞선 글에서 소개한 천문학자 심채경님은 중학생 때 고충을 일기에 털어놓으며 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반성문, 기도문으로 일기쓰기를 시작했었다.



어떻게 시작했든 간에 일기를 꾸준히 쓰다보면 일기가 가진 대표적인 강점을 경험하게 되는 듯 하다. 비공개, 비밀일기의 힘 말이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일들을 일기에는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말그대로 그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비공개 일기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음속에만 둘 수 있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유령같은 존재로 날 괴롭히는 것을 그냥 남겨두는 것이다. 공포영화에서도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면 두려움이 사라지듯 우릴 괴롭히는 마음속 유령들도 비밀일기로 폭로할 수 있다.


살생부, 데스노트 일기

사실 살다보면 나랑 안맞는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와 부대끼는 마찰에서 일어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도 그럴 때 일기에 신랄한 말을 썼었다. 그러고 나면 시원해졌다. 물론 욕만하고 끝내기만 한 것은 아니고, 시원해지고나면 나름 객관적으로 나 자신의 잘못은 없었는지, 상황과 환경의 영향은 없었는지 살피기도 했다. 잘 안되지만 어떻게 하면 마찰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도 썼었다.


인간관계가 참 힘들다는 말이 맞다. 왜냐하면 안 맞는 사람 뿐만 아니라 나랑 잘 맞는 사람과도 때로 불똥튀는 마찰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일기장에서는 가까운 이들에 대한 심한 말(!)도 있다. (물론 화해한 이야기도 꼭 쓴다!)


그래서 금곡에 일기를 보관하고 죽을 때는 일기를 태워버리고 싶다는 박보영님의 말에 '역시 그렇지요?'하게 된다.


나는 현재 나의 모든 과거 종이일기장을 커터칼로 잘라서 스캔한 뒤 PDF 파일로 만들어 현재 디지털 일기장과 통합해놓았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걸어서 보관하고 있다. 난 태우고 삭제까지 해야한다.


속으로 끙끙 앓는 편이에요

조사해보거나 통계를 본적은 없지만 확실히 일기쓰는 사람들은 내향적인 편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말을 속으로 삼키는 편일테니까 말이다. 나는 15년간 INFP였고 첫직장 생활 6년의 끄트머리에 지독한 직장 번아웃을 겪은 뒤에는 INTP로 변했다. 머리가 냉철(?)해졌다. 하지만 내향적인 성향은 여전했다.


박보영님의 성향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예인이란 직업적 특성 때문에 누군가에게 함부러 말을 못하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대서특필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직업이니까 말이다. 분명 나같이 평생 평범하게 산 사람은 다 이해못할 정도의 압박일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들도 물론 말못할 속앓이가 왜 없겠으며 내면의 살생부가 왜 없겠나. 일반화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 다 못하고 대화가 끝나는 빈도가 더 잦은게 아니겠나 싶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그게 혹시 말싸움이었으면 상황 다 끝난 다음에야 해야할 말이 막 머리에서 소용돌이 치며 '어이구 답답아, 바보야'란 말로 스스로를 때린다. 그럴 때 일기를 펼쳐서 막 쏟아낸다. 다음 전투(?)에서는 꼭 이 말을 하리라며.


연기생활을 버티게 해준 것이 일기에요

나에게는 '인생'을 버티게 해준 것이 일기이다.



나에겐 집안의 경제적 고통과 개인적인 심적 어려움을 버티게 해준 것이 일기다. 첫 직장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집에서는 육아로 심신이 지칠 때 그걸 6년이나 버티게 해준 것 중 하나 또한 일기다. 우리 집에는 두명의 아들이 있는데 첫째가 소위 말하는 '예민한 아이'다. 10살이 된 지금도 그렇다. 둘째는 꽤 무던한 편이다. 이 둘을 키우면서 '기질적으로 다르다'는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 다르다. 첫째가 태어났던 때가 직장 1-2년차였는데 밤에 잠을 잘 못자고 우는 첫째로 받는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그리고 낮에는 이쪽 업계에서 일 많기로 유명한 직장에서 일과 인간관계로 시달리며 24시간 에너지가 쭉쭉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이 때 정말 틈만 나면 일기를 썼었다. 계속해서 속에 들끓는 스트레스와 신경쓰이는 일들을 일기에 기록해서 풀어줘야 했다. 현재 22년간 쓴 일기장 PDF파일을 보면 총 5,189쪽인데 이 중에 첫 직장 생활 기간 동안 쓴 일기가 대략 2,000쪽 정도 된다. 1/3 이상이다.

스크린샷 2023-12-22 오전 9.40.07.png 일기를 PDF로 해두면 책갈피 기능이 정말 좋다

박보영님의 일기에는 분명 우리가 모르는 연기생활의 이면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내 일기장에 내 주위 사람들은 알수없는 내 마음속의 이면들이 담겨있듯이 말이다. 누군가는 겉과 속이 다르다며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나 세상에 겉과 속이 '언제나' 동일한 사람이 어딧는가? 그런 사람에게는 '경우가 없는 사람'이란 또 다른 비난의 손가락질이 날라올 뿐일테다. 자신의 겉속 다름을 아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이 있을뿐이다.


물론 악의적으로 사기치기 위해,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속을 감추고 겉을 꾸미는 것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예의상 속을 드러내지 않으며 겉으로 티내지 않는 것은 에티켓이다. 되려 일기를 씀으로서 자신의 겉속 다름이 악의적인 것인지, 에티켓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자신의 겉과 속을 이해하고 필요하다면 그 간극을 줄여가는데 적극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또한 일기이다.


SNS나 유튜브 등에 속을 드러내는 '날것의 컨텐츠'가 많아지는 이런 시대에 비밀일기에 비밀을 품은 이들이야 말로 여전히 미지의 신비를 가지고 있기에, 더 알아가고 싶은 매력을 하나 더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펜메모덕후의 첫 브런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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