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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터 보는 게 재미있다

요즘 제가 좀 그렇습니다.

요즘 뉴스기사든 유튜브 영상이든 제목과 첫 몇 줄, 첫 몇 분 잠깐 보고 곧바로 댓글창을 죽 내리며 읽는 게 재미있다. 보다 보면 영상 볼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요약해서 댓글 쓰시는 분들이 가끔 계시기도 하다. 무엇보다 싸움구경이 자극적이다. 많은 대댓글이 달린 댓글은 거의 디지털 옥타곤이다. 어느 한 명이 굽히거나 '댓삭튀(댓글 삭제하고 튐)'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TKO 될 때까지 막장 싸움하면 수십 개의 대댓글도 달린다. 그런데 이게 꼭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뉴스기사를 예로 들어보고 싶다. 뉴스기사를 쓴 기자는 2시간짜리 인터뷰에서 몇 분 내외의 짧은 문장들만 가지고 와서 기사를 쓴다. 짧고 자극적인 제목에 끌린 사람들은 들어와서 제목과 첫 몇 줄만 대충 읽어보곤 얼른 댓글창으로 눈길을 옮긴다. 베스트 댓글을 읽으며 기사 내용을 유추한다.


그런데 아뿔싸, 베스트 댓글을 쓴 이도 상황이 비슷하다. 이 사람은 대충 기사를 읽고 자기 생각을 빨리 썼고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고 베스트 댓글이 되었다. 그런데 이 댓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댓글에 대댓글을 남기기 시작한다. 자기 생각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소위 말하는 '키보드 배틀'이 벌어진다. 맞짱 뜨는 거다. 그럼 싸움구경 났다며 사람이 더 몰린다. 이제 기사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아가 원래 2시간짜리 인터뷰의 내용은 무엇인지 아무도 관심 없다. 누구 한 명이 정타 맞고 기절해서 실려나가는 것만 기다린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1) 기자는 2시간짜리 인터뷰에서 몇 분 정도의 내용만 떼어와 뉴스기사를 썼다.

2) 댓글작성자 1은 그 기사의 1/10만 읽고 자기 생각을 보태 첫 번째 댓글을 썼다.

3) 댓글작성자 2도 기사를 대충 읽고 첫 번째 댓글의 내용을 보태어 상황을 파악했고 첫 번째 댓글에 결투 댓글을 썼다.

4) 댓글작성자 3도 기사를 대충 읽고 첫 번째 댓글과 대댓글을 읽으며 상황을 파악했고 또 다른 대댓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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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넘치는 세상이다 보니 길고 긴 원본 2시간 인터뷰를 다 볼 사람은 정말 관심 있는 소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중이라 불리는 다수는 깎이고 잘리고 덧붙여진 2차, 3차 혹은 N차 창작물(?)의 관점으로 상황을 처음 접하기 쉽다. 첫인상이 중요하지 않은가. 게다가 현실 세계에서도 말을 몇 번 거치면 왜곡된다고 그러는데 인터넷의 불특정 다수에게는 어떠하겠는가. 소위 말하는 디지털 '마녀사냥'도 이런 메커니즘을 악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세상에서 휘둘리지 않으려면 원본을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항상 '중립기어'를 박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재판정까지 가게 된 사건이라면 거기서 결론이 나기 전까지 그리하는 게 좋겠다. 함부로 성급하게 확정 짓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무리의 댓글, 즉, 마녀사냥하는 댓글무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집단댓글은 우리 시대의 거대 권력 중 하나다. 디지털 인간에게 주어진 힘 중에 하나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은 이제 밈화될 정도이지만, 역시나 참이다. 우르르 몰려가서 사람 한 명을 팩트와 사견이 짬뽕된 텍스트로 파묻어버리는 장면은 살 떨리는 풍경이면서도 묘한 '죄책감이 깃든 즐거움' Guilt Pleasure을 제공한다.


출처 : 울슈타인빌트 게티이미지(Ulstein Bild via Getty Images) , 빈첸츠 카츨러, <1583년 마녀 엘자 플라이나허의 화형>

가끔 역사나 세계사 예능을 보면 과거 마녀사냥의 장면을 표현하는 그림을 보며 '끔찍하다, 무지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란 생각을 하게 되는데 미래사람들도 우리 시대의 디지털 마녀사냥을 보고 그리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도 광장에서 화형 당하던 '마녀'들을 멀찍이 관전하던,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저기 뭐라고 하나'라고 속으로 안타까워하던 사람 중 한 명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지도(위 그림의 중간에 몰려있는 군중에서 제일 뒤에 얼굴형체도 흐린 사람들 중 한명 정도).


누구나 남길 수 있는 만큼 적어도 '중립기어 박자'고 한마디 정돈 거들 수 있기도 하다. 우리도 익명의 힘을 업을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화형대에 같이 끌려갈 염려는 없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신중히 댓글을 달고 또 신뢰할만한 법적판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중립을 지키자고도 해보자. 적어도 그 무리에 참여하진 말자. 중세시대의 악몽이 디지털 세계에 도래하는 걸 막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답은 이렇게 정말 너무도 간단하다. 하지만 밋밋하고 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상천외하고 막장 드라마같이 양념 친 댓글이 펼쳐내는 '대안적 현실'이 더 재미있다. 그 대안현실이 현실이 되면 더 짜릿할 거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관심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나도 거무튀튀한 댓글의 파도 속에서 이리저리 쓸리는 것을 즐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 결과로 누군가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처절하게 몸부림치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언제나 수정가능한 디지털 텍스트에 완전히 동화되었기에 우리 시대의 말은 너무나도 쉽게 던질 수 있는 가벼운 것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정작 시커멓게 거대해진 댓글의 덩어리가 한 사람에게 놓일 때 그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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