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역사는 자신 밖에 쓸 사람이 없다.

기억, 기록 그리고 '나 자신 됨'

나 자신이 나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대신해서 써주지 않습니다. 대부분은요. 유명인들의 경우 자서전을 다른 사람들이 써주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인구에 비하면 그야 말로 극소수입니다. 싱어송라이터 이찬혁씨는 다름 사람이 자신의 자서전을 써주기를 바란다는데…


출처 : 유퀴즈 온 더 튜브

(참고로 저는 악뮤를 너무 좋아하는 40대 아저씨 팬입니다.)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의 자서전을 대신해서 기록해줄 사람은 당연히 없습니다. 검색으로 왠만한 정보는 다 찾아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나 자신의 역사는 스스로가 기록하지 않는 이상은 결코 다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기억에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뇌는 기억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기억력의 한계로 인해 내가 느꼈던 것, 배웠던 것, 후회했던 것, 기뻐했던 것 등 그 모든 독특한 인생의 경로 중 일부 기억은 '영원히' 망각 속으로 잊혀집니다. 아니면 무의식의 바다 속 어딘가에 일그러진 형태로 가라앉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는 유독 강렬했던 한 두가지 기억에만 집착할 수도 있습니다.



기록하지 않음으로 인한 흐릿한 기억, 선택적 기억은 우리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나 자신됨'이라는 정체성을 연관지어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손님 중 하나인 기억상실증을 떠올려보면 기억이 '나 자신됨'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요. 그렇다면 반대로, 기억이 선명하다면 '좀 더 선명한 나 자신'을 구축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그리고 기록은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주죠.


SNS가 이런 기록의 도구로 활용된지는 이미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그리고 SNS는 개인과 브랜드들의 정체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앞서 제가 한 말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영상 그리고 글을 조합한 기록물은 정말 강력합니다.



하지만 SNS는 '타인에게 드러내고픈 나 자신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플랫폼입니다. 이걸 '페르소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이 주장한 개념으로 '일종의 사회적 가면'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지기를 원하는지를 고려해서 만든 '외출용 가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나'라기보다는 '나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SNS는 그야말로 '페르소나의 바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좀 더 선명한 나 자신'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페르소나가 가면이라면, 여기서 '나 자신'은 쌩얼(?)입니다.



페르소나가 써내려가는 나의 역사 기록도 분명 가치가 있지만, 가면 밑의 쌩얼이 기록하는 역사도 중요합니다. 페르소나로서 쓰는 기록은 어느 선까지만 쓰고 멈추지만 맨얼굴이 기록하는 역사는 거침없이 끝까지 쓰기 때문입니다. 만약 페르소나의 일기만을 쓴다면 나 자신의 이해 또한 어느 선에서 멈출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 선명하게 나 자신 됨'을 구축해나가는 것은 비공개일기라는 뼈대와 공개일기라는 살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나 자신밖에는 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나 자신됨'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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