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부탁했습니까? 창조주여, 흙으로 빚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 달라고? -존 밀턴 [실낙원] 중에서
지난번엔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을 해봤는데요, 그 책을 읽으면서 제가 관심을 가졌던 키워드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삶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신가요? 회색빛 얼굴에 만화적 상상을 더하자면 어딘가 꿰맨 자국도 있을 것 같고...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저, 을유문화사, 2015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은 주인공 빅터의 ‘성(姓)’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주인공은 여기서 ‘피조물’이라고 불립니다. 빅터가 피조물을 만든 이유는 가혹한 죽음 외에는 어떤 질병에도 끄떡없는 인간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봤을 땐 그의 동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생명에 대한 깊지 못했던 그의 짧은 생각이 결국 그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빅터는 피조물을 만들던 자신의 작업이 끝나자 공포와 혐오감에 차 그를 외면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도망치듯 떠났지만 그의 주변에서 불길한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빅터는 두려움을 느꼈고 도망을 치면서, 피조물을 죽이기로 마음먹습니다. 빅터와 대면하게 된 피조물은 이런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공평하면서 나만 짓밟지 말아 줘. 난 당신의 정의, 심지어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 마땅한 존재니까 말이야. 내가 당신이 만든 피조물이란 사실을 기억해줘. 난 아담이 되어야 했지만,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어. P.117
누군가에 의해 탄생된 존재, 그리고 그 존재는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내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자신이 무엇이 될지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작가는 피조물의 대사와 결과에 대해 본인의 책임은 생각하지 못했던 빅터의 모습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피조물의 주장이 과연 타당하기만 한 것인지, 생명을 다루는 일에 대해 가볍게 대하기만 했던 빅터의 모습은 문제가 되진 않는 것인지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지금 또다시 다른 존재를 만들려 하는데,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 존재의 성격을 모르는 상태에 있다. P.194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앞으로 영원히 지속될 세대에 이런 저주를 내릴 권리가 내게 있을까? [중략] 후세들이 인류에게 역병을 가져온 존재로 나를 저주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렸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망설임 없이 온 인류를 희생하고 자신의 평안을 구한 존재로 말이다. P.195
결과에 대한 책임은 고민해보지 않았던 빅터의 모습은 피조물을 마주한 뒤 강요에 의해 또 다른 피조물을 만들면서 절망으로 바뀝니다. 그가 앞서 고민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했던 문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그 존재의 성격을 모르는 상태를 이미 한번 본 빅터에겐 공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는 여기서 중요한 결정을 하고 피조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추격전을 시작합니다.
소설 곳곳에서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생명이 깃든 존재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왜곡시켰던 이 책의 제목은 왜 주인공의 이름인 ‘빅터’나 ‘피조물’이 아닌 빅터의 성씨를 내세운 것일까요? 제목의 이유를 쫓아 책을 읽다 보니, 저는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 일부가 ‘가족’의 틀에서 이들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습니다.
피조물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절망을 느끼면서 사람들을 피해 도망쳐 들어간 헛간에서 ‘펠릭스’라는 가족을 알게 됩니다. 피조물은 펠릭스 가족의 생활을 관찰하며 인간들의 특성을 배우고 언어를 읽고 글을 배웁니다. 그러고 나서 인간이 가진 모순성이라던가 기이한 지식의 특성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를 만들어 낸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 존재 자체의 불완전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언어를 배우고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집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이상한 감정이 생겼어. 인간은 그렇게 강하고 덕이 높고 훌륭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중략] 인간들은 부와 결합된 고귀하고 순수한 혈통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도 배웠어.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사람들은 존경할 거야. 하지만 둘 중 하나도 없으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선택된 소수를 위해 자기 힘을 낭비해야 하는 부랑자나 노예로 간주되었지.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내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나를 창조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 친구, 재산이 전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 게다가 내 외모는 끔찍하고 혐오스럽지 p.139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p.149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피조물’이 ‘펠릭스’ 가족에 흡수되진 못했지만, 작가는 어쩌면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가족의 역할임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가족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동체인 ‘사회’에 대해 학습하는 것이지요. '사회'는 어떤 '존재'가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며,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피조물에게 그런 역할을 해준 것이 '펠릭스' 가족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그 위험성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만들어 내기만 된다고 생각했던 빅터는 가족과 같은 1차적인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해 버렸습니다.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피조물을 탄생시키고 외면한 창조주와 자신의 권리를 갈구하며 창조주의 가족을 파괴하는 이들의 관계에서 누구의 잘못이 먼저인지, 어느 쪽이 더 큰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은 처음부터 의미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이러한 결과들이 예측조차 불가한 사항은 아닐 것입니다. 이들의 진정한 문제는 생명에 대한 경시와 타인에 대한 존중이 이들에게는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어떤존재에대해실패라고단정지을수있을까요?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프랑켄슈타인’이란 익숙한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든 것을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안 다고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경험해보지 않고 안다고 하는 것은 조금 위험한 생각임을 깨달았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고전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많은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의 가장 처음 부분에는 존 밀턴의 [실낙원]의 짧은 문구가 실려있는데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공동체에 소속되기도 하지만 ‘나’라는 스스로의 개별적인 삶을 살기도 합니다. 소속되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시간을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혼자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더 안전하게, 더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 ‘사회’를 형성하고, ‘가족’을 통해 이를 미리 학습하고 그와 동시에 이와 별개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이런 모순적인 인간의 고뇌와 삶의 노력이 사실 얼마나 처절하면서도 숭고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기회를 가져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한 여름밤과 어울리는 책입니다. 길진 않지만 꼭꼭 씹어 읽어야 되는 책이에요. 대답하기 어려운 많은 질문을 담고 있거든요. :)
이번 책은 짧지만 조금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키워드는 '마음'으로 가볼까 합니다. 제일 먼저 소개해 드렸던 [한 권] '하버드 마음 강좌'의 '마음' 느낌보다는 따뜻한 마음에 관한 책을 가져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