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찰 (블랙) 코미디 에세이 「방송국 놈들」
선배님, 처음 이 방송국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예능 피디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로 졸음을 견디고, 유흥을 참고, 5차가 넘는 시험을 치렀죠. 그렇습니다. 꿈을 위해 이십 대 젊음을 바친 저는 나무보다 숲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제가 3년째 예능을 편집하며 깨달은 게 있습니다. 숲을 이루는 게 나무라는 사실이죠. 때론 인생에서 숲보다 나무가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컷 하나, 오디오 하나 만지는 디테일이 결국 이 프로그램의 퀄리티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시청자는 복잡한 의미 따위는 중요치 않았어요. 지금 당장 재밌어야 리모컨을 돌리지 않는 법이죠.
선배님, 인생도 무릇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숲보다 나무가 중요할 때도 있죠. 동료의 인정, 잘나가는 피디라는 이름표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제가 숨을 쉬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순간 아니겠습니까? 찬란한 인생이란 숲은 허상일 뿐, 행복한 순간순간이 나무처럼 모여 우리네 인생을 완성하는 것이죠. 우린 때론 허상에 속아 현재를 놓쳐요. 지금 저녁 8시 28분. 남은 편집 분량은 눈치 없이 많은 지금. 눈치 없는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고, 침으로 가득 찬 혀가 곱창의 기름을 갈구하는 지금.
잠시 밥 좀 먹고 오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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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길에서 줍고, 글은 일상에서 캡니다. (각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