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된 해준은 평소 눈여겨 보던 4인방 중 하나인 이하나와 같은 반이 되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최은영은 교실에서 사뭇 조용한 아이였다. 이하나는 어떨까? 저 전봇대 같은 아이는 홀로 남겨지면 어떤 식으로 행동할까? 해준은 괜스레 궁금했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이 접어들었다. 처음엔 살짝 어색해하던 급우들이 점차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며 연대를 맺기 시작했다. 비슷한 색깔끼리 뭉치는 아이들이 있었고, 하나의 강렬한 색이 상단에 우뚝 서고 희끄무레한 색들이 그 주변으로 모이는 형태도 있었다. 가만 보면 흥미로웠다. 강렬한 색이 내뿜는 빛의 파장 내로 들어가서 그 빛이 가지는 힘을 간접적으로 누리는 대신, 빛을 나누어주는 우두머리에게 굽신거리는 비굴함이라니…. 그게 나쁘다는 게 절대 아니다. 어찌 보면 수많은 생존전략의 한 가락이며, 해준 스스로도 남에게 해를 입지 않기 위해 취한 가장 수월한 방식이었으니까.
“야 이, 시발년아. 니 냄새난다 안 쿠나. 절로 좀 끄지라.”
“점마 저거 할배랑 살재? 이기 점마 할배 냄샌갑따, 그라몬.”
하지만 대개는 힘의 우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본인이 약자로 느껴지던 순간들을 다른 아이들이 자기로 인해 똑같이 느끼게끔 만들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을 밟고 서 있는 듯한 위계를 조성했다. 비굴함을 감내함으로써 얻은 힘을 자길 보호하는 데 써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힘을 이용해 다른 아이들을 괴롭혔다. 해준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하나는 제법 장골이었다. 교내 배구부 선생이 제발 입부 하라며 학기 초부터 뒷문을 들락날락했지만, 이하나는 의외로 피아노 전공으로 예술고등학교 진학이 목표라고 했다. 다리도 길고, 팔도 길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다 길었다. 창가 뒷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았다.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앉으면 책상이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앉을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댔다.
이하나의 색은 강렬했다. 덩치뿐만이 아니라 쏘아보는 눈빛, 풍기는 아우라가 그랬다. 집도 잘 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빠는 양식장 주인이고 엄마는 도천여고 선생인데, 엄마가 학기 초에 수거하는 촌지가 아빠가 전국으로 멍게를 팔아치우고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갑절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교탁 바로 앞에 앉는 해준과 분단 맨 마지막에 앉는 이하나가 굳이 엮일 운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준의 짝꿍이 하필이면 조실부모하고, 어린 동생과 함께 할아버지와 셋이 사는 형편이 어려운 여학생이었다. 짝꿍은 이름마저 약해 빠졌다.
“소옹, 가려언! 거서 냄새 풍기지 말고 후딱 일로 튀, 오이라.”
송가련.
씨이발. 짝꿍의 이름이 더럽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해준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이 세상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그 점도 부친을 잃은 소년의 심기를 건드렸다.
해준은 3등분으로 나뉜 칠판을 응시하며 공책에 필기를 이어갔다. 선생의 손에 끌려다니는 백색 분필이 칠판을 가득 채웠다. 더 이상 쓸 공간이 없자, 선생은 칠판의 가장 왼쪽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금 그 자리를 하얗게 메워나갔다. 장성웅이라는 선생은 저렇게 한 시간 내내 필기만 하다가 수업을 마쳤다. 마지막 5분은 학생들이 필기를 제대로 따라왔는지 검사하는 시간이었다.
장성웅이 50cm나 되는 사랑의 매를 세로로 들고 해준의 책상을 콕, 찍었다.
“댔다.”
하지만 그 검사는 점점 사라져가는 장성웅의 머리숱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선생은 학생이 펼쳐 놓은 마지막 페이지만 대충 훑고는 다음 학생으로 넘어갔다.
해준이 공손한 음성으로 장성웅을 붙잡았다.
“앞에도 보셔야죠, 선생님. 얼마나 공들여 받아 적었는데요.”
장성웅이 성긴 눈썹을 들어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머슴아 필체가 으째 가시나 같노. 니 이름이 해주니제?”
“예, 선생님.”
해준이 명찰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몬 함 보자, 을매나 깔끔하그로 적었는고.”
장성웅은 검지에 침을 묻혀 페이지를 앞으로 넘겼다. 필체가 너무나도 반듯해 마치 인쇄소에서 갓 뽑아낸 활자 같다. 장성웅은 흐뭇하게 웃으며 공책을 덮었다.
“잘했네, 잘했어.”
해준도 흡족해하며 공책을 서랍에 넣었다. 편한 자세로 앉아 다음 수업 교과서를 꺼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장성웅이 교실 뒤편에 앉은 학생들의 필기를 검사할 때였다.
“이게 뭐꼬?”
노기가 서린 음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