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방문자
기우가 아니고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현실이 주연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집안의 누군가가 속옷에 손을 대고 있단 가능성을 새엄마에게 알려야겠단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용의자 하나는 순옥의 남편이고 나머지 하나는 순옥의 아들이 아닌가. 경중을 따지기도 힘들었다.
베드로 아저씨는 하복에 비치던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치기도 했고, 이병진은 등보다 가슴을 더 자주 때렸다. 성장통에 멍울이 생겨서 아프다고 하면 아파하라고 하는 거라며 더 세게 꼬집곤 했다. 순옥은 그 장면을 곁에서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아아 고만 쫌 괴롭히라.” 그게 다였다. 그래서 괴롭히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팬티에 손을 댄다? 평범한 괴롭힘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고민에 한참 휩싸였을 무렵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순옥을 따라 미사에 참석한 적은 몇 번 있어도 주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물론 순옥도 병진도 마찬가지였다. 합가한 후에는 최은영과 베드로 아저씨만 성당에 나갔다. 보름 동안 진행된 성경 수업이 끝나고 마지막 주말이 되자 캠프를 간다며 최은영이 1박 2일 외박한 적이 있었다. 주연으로서는 실로 처음 독방을 쓴 날이었다.
작은 거실과 작은 주방 사이 양은 식탁을 펴 놓고 넷이 옹기종기 앉아 저녁밥을 함께 먹었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빨간 콩나물국에 하얀 쌀밥을 말아 김치를 얹었다. 다 먹은 베드로 아저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나가고, 병진은 삐삐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음식을 남기고 후다닥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연은 밥풀이 들러붙은 그릇을 싹싹 긁어 먹었다. 그래야 새엄마가 좋아했으니.
그날 밤은 똑바로 누워 잠을 청했다. 등을 돌리고 자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미동도 없는 공기가 가라앉았다. 그 사이사이 초바늘이 째깍, 째깍, 시간을 밀어내는 떨림을 자아냈다. 고막을 두드리는 일정한 소리가 최면을 걸듯 순식간에 깊은 잠으로 안내했다. 꿈을 꾼 기억은 나지만 내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약하게 진동하는 시곗바늘 소리를 덮은 어떤 기척에 주연은 비몽사몽 현시로 돌아오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은영이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나?
긴가민가하며 실눈을 떴을 때였다. 커다란 실루엣이 잠이 덜 깬 망막에 어슴푸레 새겨졌다. 최은영은 신앙 캠프에 갔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솜털이 쭈뼛 섰다. 엄만가…? 엄마일 리 없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오는 무언가가 새엄마일 리 없지 않나. 모골이 송연해졌다. 구렁이가 다리를 휘감으며 올라온다.
주연은 머릿속이 새하얘져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너무 놀라 얼어붙는다는 걸 난생처음 체험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감히 움직일 수 없다. 가위에 눌렸다. 꿈일까? 생시일까? 누굴까? 대체 나한테 뭘 하는 걸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 젖 먹던 힘을 다 해 몸을 뒤척일 수 있었다. 봐라. 내가 일어났다. 네가 날 깨웠다. 당신이 나한테 하는 짓을 나는 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자고 있다. 모른 체 해줄 테니 부디 당장 꺼져달라, 는 무언의 호소였다. 주연으로서는 그게 최선이리라.
엄마를 부르고 싶었다. 장난으로 치부하는 새엄마 말고 친엄마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주연을 두고 도망간 지 오래였다. 엄마가 어떻게 생겼더라…? 비명이 닿을 수 없는 시공간이 모녀를 갈라놓는다. 베개가 축축하고 뜨끈하다. 주연이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검은 실루엣은 주춤거리며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예민해진 귓가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가두고 있던 숨이 비로소 몸 밖으로 터졌다. 주연은 그대로 누운 채 눈만 끔뻑였다.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조용하다. 어언간 잠이 들었고, 환한 아침이 되어서야 꿈에서 깨어났다. 어젯밤의 불쾌한 방문이 생시인 걸 자각하면서도 애써 꿈이라고 여겼다. 그땐 그래야만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가족을 가족으로 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 후로도 팬티는 수시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옷장 서랍 속 배열은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범인은 이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장난이니까 피해자가 무시해야 하는 괴롭힘은 지속되었다.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그럴수록 주연은 문제집을 파고들었다.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어서 수능을 보고 이 집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넘어 절박했다.
손님이 드문 시간이었다. 주연은 카운터에 앉아 문제 풀이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대여점을 찾은 하준희는 골방에 앉아 눈으로는 만화책을 손으로는 학원 숙제를 끄적였다.
“주니야.”
“어.”
“니 그 얘기 아나?”
“머?”
“얼마 전에 텔레비에서 봤는데….”
급류에 휩쓸린 어린아이를 구한 휴가 나온 군인의 이야기. 영웅을 소개하는 뉴스가 지상파 방송을 탄 후, 어렸을 때 버스터미널에서 부모를 잃어버렸다는 군인의 안타까운 사정이 전 국민이 시청하는 아침마당을 울렸다. 사연이 소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동일한 터미널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어떤 부부가 방송국으로 문의하였고, 서로가 가진 기억을 맞추어 본 군인과 부부가 만났는데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보아 가족임이 밝혀졌다. 비록 유전자 검사는 하지 않았지만 군인의 몸에는 밀가루 반죽을 마구잡이로 짓이긴 듯한 끔찍한 화상 자국이 있었고, 그 모양과 위치는 부부가 오랜 세월 고이 보관하고 있던 사진 속 어린 아들의 상흔과 닮았다.
“아, 어. 내도 봤다.”
머리를 빼꼼 내민 준희가 운동화를 구겨 신고 골방에서 나왔다.
나도 텔레비전에 나오면 친엄마가 찾아올까? 주연이 준희에게 물었다. 카운터 맞은편에 와서 걸음을 멈춘 준희는 물끄러미 주연을 내려다보았다.
“니 물장구는 좀 치나? 내가 빠질끄마 니가 구해줄래?”
건성으로 말하는 입가와 달리 준희의 눈빛은 진지했다.
“진짜로?”
준희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고, “우야노. 내 수영 못 하는데….” 주연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니 검정고시 다 보고 수능도 본댔제? 새엄마가 대학에 보내준다꼬 캤고.”
“어. 한 학기 등록금은 주신댔다.”
알뜰하게 모은 알바비는 자취방을 얻는 데에 사용하기로 했고.
“그라몬 확 마 수능 만점 받아삐라.”
“으, 어?”
“텔레비에 나와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하믄 니 버리고 도망간 어무이도 연락 안 하긋나. 아니면 가수나 탈랜트 같은 거는 어떤노? 연예인 돼 가꼬 텔레비에 나오면 분명히 니 찾으러 올끼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능 만점은 언감생심이고 가수나 탤런트가 되는 루트는 알지도 못한다. 잡지에 실린 연예인들 데뷔 담을 읽어보면 죄다 길거리 캐스팅이라고 하던데, 그러려면 예뻐야 하고 서울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 주연이 아는 건 딱 그 정도였다.
“와, 갑자기 친엄마 보고 싶나?”
준희가 당연한 걸 묻는다. 주연은 1 더하기 1이 2라고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풀던 수학 문제나 계속 풀었다.
“무슨 일 있나?”
준희가 주연의 정수리를 헝클며 또 물음표를 던졌다. 무슨 일이 있는 건 맞지만 아무리 준희라고 해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어떤 직각사각형의 가로 길이가 2x+3이고, 세로 길이가 x-1이고, 이 직각사각형의 넓이가 36일 경우, x의 값이 무엇인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주연은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얘기해 봐라 내가 도와줄끄마.”
엉클던 손길이 멈추고 이내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반듯한 가르마를 만들며 준희가 주연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다정한 손끝은 더 친밀하게 다가와 주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일순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도와준다?
누가, 나를.
도와준다라….
눈앞의 준희가 물속에 차츰 잠겨갔다. 잠시간 출렁이던 세상은 주륵, 눈물방울이 되어 볼을 적셨다. 미련하고 부질없이 턱 끝에 매달렸다. 별안간 감정을 드러내는 주연을 바라보던 준희에겐 놀라는 기색이 전연 없었다. 그저 손등으로 주연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묵묵한 다정함이 선사하는 위안에 펑펑 울고만 주연의 정수리에 살포시 턱을 괴었다.
준희라면, 하준희라면 털어놓고 싶다.
집이 조금 무섭다고.
며칠 뒤 주연은 북받치는 감정에 못 이겨 결국 속엣말을 토하고 말았다. 하지만 준희의 반응은 주연이 상상치도 못한 범주의 것이었고, 섬뜩함마저 감도는 준희의 눈빛에 소름과 후회가 막심하게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