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
준희를 태운 학원 차가 출발하는 것까지 눈에 담고 나서야 주연은 시내버스를 탔다.
미륵여중에 다니는 양민정이 알아본바 인평중에는 하씨 성을 쓰는 ‘준희’라는 이름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주연은 인평중 교복을 입은 하준희가 인평중 교문을 통과해 하교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게다가 하준희의 이름을 짓씹듯이 똑똑하게 발음하는 인평중 교복을 입은 남학생도 만났다. 준희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고, 진짜 학원 차를 타고 사라졌다.
양민정이 거짓말을 했다거나 민정의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형체가 없는 말을 전달하다 보면 중간에 실수나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주연은 자기가 직접 보고 들은 것만 믿기로 했다. 그렇게 취급하기로 했다. 미심쩍었던 부분이 죄다 해소되었다. 마음이 가벼워져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대여점으로 돌아온 주연은 어서 일요일이 오길 바라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외출 중’이라고 적힌 아크릴판을 걷어 서랍에 넣었다.
*
“준희가 인평중에 다닌다고 했던 거, 그거 거짓말 아니었어.”
주연이 한참을 뜸 들이다가 대답했다.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하와이안 피자를 오물거렸다. 숨어 있는 시큼한 끝맛이 역시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양민정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라몬 그때 와 가한테 죽으라고 꽥꽥 고함 칬는데?”
“….”
“니 그렇게 화내던 거 내 처음 봤다 아이가.”
“….”
“까묵은 거 아니면 인자라도 함 털어놔라.”
“….”
“가한테 죽으라고 한 거 그때 진짜 와 그랬노? 둘이 억수로 친했다매?”
주연은 양민정이 쏟아내는 질문을 듣기만 했다.
어렸던 주연은 크나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하준희에게 죽어버리라고,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건 준희가 주연의 비밀을 들추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자기를 무력하다고 비난해서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사정을 네가 알 턱이 없으면서…!
당시 청소와 세탁은 주연의 몫이었다. 새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자칫 밉보여서 보육원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해 온 집안일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주연의 역할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김순옥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바깥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기엔 불혹의 징벌이 순옥의 삭신을 쑤시게 했으니.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다른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순옥조차 고맙다는 말을 아꼈다. 오히려 완벽하게 해 놓지 않으면 베드로 아저씨나 병진 오빠에게 야단을 듣기 십상이었다.
최은영은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에게 주연이 식모라서 구태여 데리고 사는 거라고 했다. 입주 가정부. 그렇게 얘기했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귀가하면 모두가 자고 있었다. 새엄마와 베드로 아저씨는 안방에서, 병진 오빠는 거실에서, 그리고 최은영은 작은방에서 잤다. 주연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작은 거실을 가로질렀다. 조심스럽게 유리 문을 밀어 열고 슬리퍼를 신었다. 아침에 건조대에 널고 나간 옷가지를 거두어 가슴으로 안고서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코골며 자는 병진의 몸을 빙 둘러 욕실로 직행했다.
엎어놓은 자주색 고무 대야를 집어 바닥에 놓고 옷가지를 담았다. 주연은 선 채로 옷을 갰다. 다 개킨 옷은 뚜껑을 닫은 세탁기와 좌변기에 차곡차곡 포개어 놓았다.
“어…?”
누런 조명 아래에서 하루를 마감하던 주연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핏자국이 생길까 봐 생리할 땐 절대 입을 리 없는 흰색 팬티였다. 이게 왜 여기에? 이번 달 생리는 닷새 전에 시작했고, 주연은 보통 일주일간 생리대를 찼다.
가족이 다섯 명이나 되는 까닭에 어쩌다 하루라도 빨래를 거르면 세탁 바구니가 차고 넘쳤다. 그러면 베드로 아저씨나 병진 오빠가 주연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를 찌르곤 했다. ‘네까짓 게 이 집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이유.’ ‘우리 엄마가 널 데리고 있는 이유.’ ‘그 이유가 사라지면 우린 널 내다 버릴 거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최은영이 실수로 주연의 속옷을 입었을 리는 없었다. 최은영은 자기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연필 한 자루라도 주연의 것은 더럽다며 만지기조차 꺼려했다. 순옥이 서호시장에서 열 켤레에 5천 원 하던 양말 묶음을 사서 두 의붓딸에게 각각 다섯 켤레씩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모양도 같고 사이즈도 같지만 최은영은 자기 양말은 귀신처럼 분간했다. 그런 최은영이 설마 무늬도 색깔도 다른 속옷을 헷갈렸을까? 각자가 사용하는 옷장 서랍도 다른데?
처음에는 어쩌다 빨랫감에 딸려 들어갔나 보다 했다. 방 두 칸 작은 아파트에서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살고 있으니. 하지만 기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연을 혼란스럽게 했다.
“연아! 이게 와 여 있노?”
아침 일찍 대여점으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던 주연을 붙잡은 건 순옥이었다.
“머?”
“니 빤스가 와 바닥에 뒹굴고 있노?”
“어?”
주연은 신을 구겨 벗었다. 순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욕실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내 팬티가 어데?”
“이 가시나야, 여어.”
순옥의 손가락이 가리킨 장소는 쓰레기통과 변기 사이였다.
“빨래 개키다가 떨가뿐나?”
새엄마는 주연의 등짝을 때리며 칠칠치 못한 의붓딸을 나무랐다. 이 집엔 여자들끼리만 사는 게 아니니까 속옷 같은 건 스스로 잘 챙기라고 했다.
그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도 있었다. 주연은 꽤 깔끔한 성격이었다. 속옷을 정리할 때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생리할 때 입는 팬티, 대충 입는 팬티, 속옷 자국이 비칠지 모르는 하의를 입을 때 신경 써서 입는 팬티를 구분해 놓았다. 이는 색깔이나 무늬로 나뉘는 게 아니라서 분류의 기준은 타인이 눈치채기 쉽지 않았다.
개킨 속옷을 보관하기 위해 서랍을 당겼을 때였다. 아주 약간 흐트러진 도열은 한 박자 느리게 알아차렸지만 부지불식간에 시선을 빼앗긴 건 구분이 섞인 현장이었다. 절대로 함께 묶어놓지 않는 카테고리가 뒤섞였다. 명백한 타인의 흔적이었다. 손이 탔다는 거다.
들이켠 숨을 내뱉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주연은 그대로 얼어버렸고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멍하게 뜬 눈만 끔뻑였다. 등줄기에 돋아난 끔찍한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턱을 휘감으며 기어올랐다. 기우가 아니고 실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현실이 주연의 사고를 정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