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저기, 호피 무늬 뿔테! 하준희다!
알은체하려고 한 발짝 내딛는 순간, 회피하고 싶은 4인방이 준희를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주연의 심장이 쿵쿵거린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지? 어금니를 사리 물었다. 주연의 교복을 재떨이처럼 사용하던 4인방이었다. 화상을 입은 피부에서 고름이 나던 악몽이 멱살을 거머쥔다. 주제도 모르고 나서지 말라고. 손바닥에서 땀이 차오른다. 어서 준희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주먹을 말아쥔 주연은 기어코 방패막이에서 벗어나 교문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아아아! 야! 하지 마!”
저도 모르게 괴성이 튀어나왔다.
준희를 에워싼 4인방과 4인방을 둘러싼 수많은 구경꾼의 이목이 한꺼번에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주연에게 쏠렸다. 웅성거리고 비아냥대는 소음이 이명처럼 주연의 양쪽 귀를 오고 갔다. 주연은 교복 입은 아이들을 밀치고 4인방을 대면했다. 멸시와 조롱에 가까운 네 쌍의 눈알이 주연을 움츠러들게 했다. 자꾸만 굴러떨어지는 시선을 의식적으로 붙잡은 주연은 절벽에서 발을 헛딛는 동료를 구하듯 준희의 팔목을 워럭 낚아챘다.
“이건 또 뭐고?”
“그 손 안 놓나?”
“뭔데 이년은?”
“놔라!”
4인방이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고함쳤다. 김한나와 최은영이 주연과 준희의 앞을 가로막고, 조미주와 송지영이 준희의 책가방을 움켜잡았다. 조미주가 어깨끈을, 송지영이 손잡이를. 먹잇감을 놓칠세라 칭칭 감겨오는 거미줄에 주연은 정신이 아뜩했다. 어쩌지? 얘네들을 어떻게 밀치고 도망치지?
“어, 이거, 고아년 아이가? 심주여니?”
김하나가 잔학하게 웃으며 주연의 야구모자를 튕겨 벗겼다.
바로 그때.
“뛰라.”
준희가 과감하게 책가방을 포기했다. 모두가 멈칫하는 찰나, 준희의 팔목을 감아 잡고 있던 주연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이번엔 준희가 주연의 손목을 날렵하게 잡아챘다. 팔이 홱 당겨지면서 허리가 워럭 앞으로 숙여졌다.
“뭐하노? 가자!”
뭐가 재밌는지 준희는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주연도 따라 웃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준희가 웃어서 같이 웃었다. 그랬더니 재미도 없는 이 상황이 희한하게 즐거워질지도 모르겠단 예감이 들었다.
“가자!”
뒤통수에 대고 4인방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다. 금세 머리채가 잡혀 얻어맞을 줄 알았는데 벌써 버스 정류소를 지나, 문방구를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로 두 정거장이나 떨어진 수산전문대 캠퍼스였다. “하아, 하아…!” “하하.” 목구멍에 달린 심장이 거친 숨을 터뜨린다. 마스크를 벗으니 땀으로 범벅이었다.
“하, 하하!”
준희가 허공에 대고 크게 웃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만다꼬? 와 웃는데?”
“인자 자들 우정에도 금이 갈끼다. 쫘-악. 쫙.”
“어?”
무슨 뜻일까?
“여나, 은영이가 집에 와서 질질 짜고 그라믄 니가 좀 달래줘라.”
“어?”
주연은 어깻죽지로 땀을 훔치며 이유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준희는 곧 알게 될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며, 숨을 고르고 있는 주연의 등을 가볍게 툭툭, 다독였다.
“야!”
불현듯 고막에 꽂히는 성난 음성에 주연이 흠칫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4인방의 하이톤이 아니라 변성기를 겪는 중인 또래 남학생의, 목청을 긁으며 나오는 쇳소리였다. 설마 자기를 부르는가 싶어 당황한 주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함께 ‘야’ 소리를 들은 준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웃음기가 삭 가신 준희는 별안간 차가워진 눈빛으로 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평중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누구…?” 주연은 눈치를 보며 “니 아는 아아가?”하고 준희에게 귀엣말했다. 준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한 걸음 남학생 쪽으로 다가가더니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는 애가 맞나보다.
“시발, 점마들이…! 씨-입, 열어보면 우얄라고 가방을 내팽기치노?”
남학생은 준희의 책가방을 흙바닥에 던졌다. 말투만 거친 게 아니라 생긴 것도 양아치였다.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쭉 째진 실눈은 말할 것도 없고 과연 쭈그려 앉으면 어딘가는 분명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교복을 줄여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문제아였다. 기장도 발목이 보일 정도로 짧았다. 하준희는 공부를 잘하는데, 교복도 줄여 입지 않는데, 어째서 저런 일진 같은 녀석이랑 아는 사이인 걸까?
“땡큐.”
준희가 허리를 숙여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약속한 거나 지키라, 하, 준, 희, 씨-바-알!”
붉으락푸르락하며 옅은 눈썹을 세우고 있는 남학생은 꽤 화가 나 보였다. 하얀 운동화로 흙바닥을 파듯 거칠게 찼다. 준희는 날리는 모래를 정면에서 맞고도 태평했다. 그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귀찮다는 듯 “인자 가라.”라고 했다. 남학생은 바닥에 나뒹구는 자갈이며 빈 캔을 축구공처럼 뻥뻥 차며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느그 반… 3반 아아가?”
주연이 조심스레 묻자, 준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동네 친구를 운운했다.
남자 친구일까? 설마 아니겠지? 주연은 괜히 친구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교복을 저 정도로 줄여 입은 남자애가 남자 친구이면 4인방이 준희를 대놓고 괴롭히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여자 일진보다는 남자 일진이 더 무서우니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주늬 니, 연합고사 준비한다매….”
“긍데?”
“공부해야지.”
“해야지.”
“쟈랑….” 요즘 니 나랑 안 놀고 저 남학생이랑 노나? 하고 직설적으로 섭섭함을 표하고 싶었지만 “…노나?” 입술을 질근 깨물고 의도보다는 한층 순화해서 물었다. 부디 속내를 읽었길 바라며.
준희는 가방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어깨끈을 둘러매고 평소처럼 입꼬리를 당겨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학원 차 타러 간다.”
“어, 어….”
“주말에 갈끄마. 일요일 학원 끝나면.”
“일요일에도 공부하나?”
“어. 성문 영어.”
“몇 시에 끝나노?”
“오전에 끝난다. 롯데리아 가서 불고기버거 세트 사가꼬 책방으로 갈끄마.”
“은냐.”
준희는 인평중과 경상대 사이 학생들을 실어 나르는 봉고차와 소형버스가 줄지어 정차한 곳으로 달음박질쳤다. 주연은 몰래 따라가 멀리서 지켜보았다. 준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차량 중에서 ‘세진입시학원’이란 푯말이 적힌 소형버스에 탑승했다. 준희를 태운 학원 차가 출발하는 것까지 눈에 담고 나서야 주연은 시내버스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