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콘
“어어, 그래, 그라자….”
M자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 창문을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밀어 열었다. 밖에서 공사하는 소음이 들이닥쳤다. 공기는 이분화되었다. 해준의 공기는 그대론데 슬쩍 본 M자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영필아.”
“크, 켁, 케엑, 퉷! …어, 어?”
“나 그런 농담 좋아하지 않아.”
“어? 어? 뭐?”
“그런 거 있잖아. 나 작다고 놀리는 거.”
“아, 아…!”
“키 작다. 좆 작다. 이러면서 우습게 보는 거.”
“아, 미, 미안. 좀 심했제?”
“응. 선 좀 넘었지.”
“미안타, 미안타. 다시는 안 그랄꾸마.”
해준은 M자가 사용했던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변기에 반도 더 남은 담배를 버리곤 레버를 발로 꾸욱, 눌렀다. 나오는 길에 선한 시선을 부드럽게 던지며 다정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래. 미안한 거 알면 우리 다음부터는 조심하자, 응?”
먼저 화장실을 나온 해준은 비상구 층계를 내려갔다. 분신처럼 차고 다니는 워크맨을 만지작거리다가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뻔하고 지루한 영화가 막을 내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태화백화점이 있는 서면으로 건너가기 전에 남포동에서 허기를 채우자고 결정한 무리는 시간 낭비 없이 분식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세 개에 일행은 나누어 자리했다. 각자 시킨 메뉴는 본인이 계산하고, 다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 주문한 비빔만두는 더치페이하기로 하였다.
비빔만두 말고도 나누어 먹을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방금 관람을 마친 스포츠 타운의 여자 주인공 세미. 누군가는 이담에 커서 헬스장 코치가 되어야겠다며 포부를 밝혔고, 누군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배우처럼 예쁘고 몸매 좋은 여성과 결혼할 거라며 각오를 다졌다.
비빔만두가 나왔다. 시뻘건 양념장에 채소와 김 가루를 잘 비벼서 기름진 만두피에 싸 먹는 요리였다. 열한 명의 성장기 소년들이 한 번씩 젓가락질하자 커다란 접시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화제는 여주의 몸매 예찬에서 여자 연예인 가십으로 전환되었다. 억측이 난무하고 되바라진 상상이 나래를 펼친다.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으면 된다. 맡기 싫은 건 콧구멍을 틀어막거나 잠시 숨을 참고 기다리면 되고. 하지만 듣기 싫은 건 귀를 덮고 외면해도 소용 없다. 해준은 자리가 불편했다.
폭격처럼 퍼붓던 저질스러운 언사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건 각자가 주문한 음식이 차려진 후였다. 배를 채우느라 입이 쉴 틈이 없는 까닭이리라. 해준과 현정무는 누가 단짝 아니랄까 봐 똑같이 작은 그릇에 우동이 추가되는 돈가스 정식을 먹었다. 오동통한 면발을 호로록 흡입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얼마 전에 미륵여자중학교와 5:5 미팅을 진행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시선을 들어보니 화장실에서 만났던 M자 이마였다. 3분 만에 치즈라면과 치즈김밥을 하마처럼 먹어 치운 녀석은 본인이 왜 폭탄 처리반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라며 억울함을 토해냈다.
“예쁜 아아 있드나?”를 시작으로 물이 아래로 흐르듯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통영에 사는 주변 여자 이야기로 물꼬가 텄다. 예쁜 애는 어느 학교에 많은지, 걸레는 어디서 짜면 되는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둥 더러운 오물이 밥상 위로 쏟아졌다.
“그거 아나? 이병진 이 새끼 시스타 콤풀렉스 이따 아이가.”
야구모자를 눌러쓴 3학년이 말했다.
“무슨 소리고?”
“인평중 2학년에 점마 여동생이 둘이나 있는데…. 아 맞다, 쭈니 새끼, 니 인평중이제?”
“아? 예.”
해준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야구모자를 쳐다봤다.
“니랑 같은 학년이몬 알 수도 있긋다.”
“이름이 뭔데요?”
“하나는 심주연이고, 다른 아아는 최은영.” 야구모자는 이병진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맞제?”
이병진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찢어진 눈을 흘겼다.
“1반의 최은영이라면 알아요. 같은 반이거든요. 근데 왜 셋 다 성이 달라요? 병진 형은 이 씨잖아요.”
“부모님이 다 다르거덩.”
야구모자가 어딘지 모르게 이병진을 자신보다 낮추어보는 표정을 지었다. 저러다 처맞을 것 같은데….
“고마해라, 밥맛 떨어진다.”
이병진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은냐, 은냐.”
싱글싱글 웃는 얼굴의 야구모자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 해준은 세 남매의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 다른가, 하고 지레짐작하였다. 이병진의 시스터 콤플렉스에 관해서는 집으로 가는 길에 현정무가 부언해 주었다. 부산 사상에 있는 서부터미널에서 통영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무전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 일행은 거기서 헤어졌다. 혼자 가야 하는 녀석은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하고, 한동네에 모여 사는 녀석들은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김해준과 현정무는 북신시장을 지나 토성고개를 넘어 가는 도보를 택했다.
“최은영이란 아아랑 같은 반이랬제?”
“응.”
“가 말고, 심주연이란 아아도 인평중인데, 내가 듣기론 가가 부모가 없단다.”
“어?”
현정무가 풀어서 이야기해 준 한 아이의 가정사는 참 딱했다. 친어머니가 도망가고, 친아버지가 이병진 모친과 재혼하고, 친아버지가 죽고, 이병진의 모친이 최은영의 부친과 재혼했다는 안타까운 사정. 다 듣고 나니 심주연이란 아이의 삶이 참 박복하다.
“병진이 형이 여동생 둘을 그래도 잘 챙기나 봐?”
“머시라카노?”
“어?”
“가가 그럴 새끼로 보이나? 그 양아치 새끼가.”
“시스터 콤플렉스라며?”
동생들을 살뜰하게 챙겨서 그런 거 아냐?
“최은영은 잘 모르긋고, 심주연이란 아아 바스트가 장난 아니그든. 그래서 가 대놓고 찍은 새끼들이 몇 명 있었는데, 병진이 새끼가 금마들 반쯤 직이났다 아이가. 시스콘은 그거 땜시 생긴 별명이고…. 내가 봤을 땐 그 새끼가 오히려 더 음흉하다고 본다.”
여전히 룸살롱 기숙사에서 지내는 현정무의 짐승 같은 육감은 틀리기가 오히려 힘들었다.
심주연. 평범한 이름 앞에 붙은 꽤 특이한 성씨. 그날 한 번 듣고 머릿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진 존재지만 다시 그 이름을 우연히 들었을 때 불우한 그 아이의 사정이 무심결에 떠올랐다.
“야! 심주연!”
“어데 가노? 일로 온나!”
해준은 최은영의 무리가 괴롭히던 7반 아이가 바로 심주연임을 가을운동회 연습이 한창이던 9월 말에 깨달았다. 수돗가 뒤편 빼곡하게 들어찬 관목이 있다. 그 너머는 별관 건물 뒤편인데 주로 담배 피우는 아이들이나 몰래 숨어드는 공공연한 비밀 장소였다.
5교시가 끝나고 6교시가 시작하기 전이었다. 해준은 느릿느릿 수돗가로 가 땀으로 젖은 목덜미를 씻었다. 물을 마시는 참에 시원하게 세수까지 해버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해준은 그러지 않았다. 안나 형이 아침에 발라준 선크림은 비누도 없이 물만 묻히면 눈알을 따갑게 해서였다. 관목 사이로 욕설이 들렸다. 살며시 다가가 틈새로 안을 살펴보는데 심주연과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심주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은 벌어지지 않았다. 딱 보아하니 최은영의 패거리가 담배를 태우는 동안 망을 보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선도부원인 해준은 완장을 휘두를지 잠시 고민했지만 관두었다. 괜히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불쌍한 저 아이가 패거리에게 또 당할 것 같아서.
10월이 되고 운동회가 열렸다. 청팀과 백팀으로 나뉜 전교생은 운동장에 모여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다소 진부한 기념사를 들었다. 그늘진 구령대에 선 교장 선생과 교감 선생의 격려와 당부, 그리고 국민체조가 이어졌다. 음악에 맞춰 몸을 풀고 나자 본격적인 행사 일정이 시작되었다. 운동장을 나누어 줄다리기, 공 굴리기, 씨름과 기마전이 펼쳐졌다. 10시 반쯤에 반별로 학급 어머니회에서 준비한 간식이 전달되고, 또 연달아 2인3각과 계주를 알리는 총성이 터졌다. 점심 바로 직전에 1학년이 준비한 단체 율동을 감상한 뒤 한 시간 가족 타임이 주어졌다.
해준은 어머니가 돗자리를 펴 놓고 기다리겠다고 한 장소로 걸어갔다. 커다란 교목 아래 약속대로 어머니 권혜자, 그리고 미용실 직원인 오정미 누나, 김영지 누나, 그리고 조안나 형. 그렇게 총 넷이 해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와 등, 겨드랑이는 땀범벅이었다. 권혜자가 아이스박스에서 반쯤 언 물병을 꺼내며 해준에게 내밀었다.
“목부터 축이라.”
플라스틱병을 양손으로 주물럭거렸다. 얼음이 부서졌다. 해준은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켰다. 김밥은 김영지의 작품이라고 했고 유부초밥은 안나의 솜씨라고 했다. 오정미는 과일을 깎아주었고 권혜자는 비디오카메라로 배 터지게 점심을 해치우고 있는 해준을 렌즈에 담았다.
운동회가 끝나고 돌아온 주말에 해준은 권혜자가 찍은 비디오를 텔레비전과 연결해서 그날의 영상을 감상했다. 화면 구석에 심주연이 몇 번 잡혔다. 돗자리에 앉아 가족과 함께 밥 먹는 모습이 아니라 혼자서 도시락을 들고 교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는 장면과 나오는 장면 그리고 수돗가로 가 물을 마신 후, 빈 도시락을 돗자리에 앉아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 건네는 장면이었다. 유난히 화장기가 짙은 아주머니었다.
해준은 비디오를 되감았다. 아주머니의 정체는 심주연의 의붓어머니인가 보았다. 심주연이 없는 돗자리에는 의붓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과 의붓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성이 최은영과 오붓하게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녹화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스치듯 떠올랐다. 하지만 잠시 생각난 것,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