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활주로에 착륙한 비행기의 문이 열렸다. 계단을 실은 차량이 기체에 붙고 앞좌석에 탄 승객부터 차례로 소지품을 챙겨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할 필요도 없이 조그마한 공항이다. 지상으로 내려온 해준은 형광색 안전조끼를 걸친 직원이 가리키는 출입구로 걸어갔다. 짐은 수화물로 부친 작은 캐리어 하나였다. 한가한 공항의 컨베이어 벨트는 단 두 개였는데 제주발 사천행 수화물은 약간의 지연도 없이 조속히 내려져 하나둘 주인을 찾아갔다.
사천공항과 통영을 잇는 셔틀버스는 일찍이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갈지 잠시 고민하던 해준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통영 항남동요. 자세한 위치는 가서 알려드릴게요.”
짐을 트렁크에 실은 해준은 조수석 뒷좌석에 앉아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감상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가로수 너머로 높다란 산등성이에 둘러싸인 시골 학교가 보였다. 해준이 다니던 인평중학교도 저렇게 길게 이어진 능선 아래에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늘을 떠받들고 있던 능선이 육지에서 끊어지지 않고 해안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작된 중학교 2학기는 가을운동회 준비로 한창이었다. 1학년은 월화·목금 4교시에 운동장을 사용했고, 2학년은 월화·목금 5교시를 이용했다. 그리고 짝수 반은 월요일과 목요일, 홀수 반은 화요일과 금요일이었다. 마지막으로 3학년 짝수 반은 수요일 4교시, 홀수 반은 수요일 5교시였다. 토요일은 평소처럼 오전 수업만 하고 하교였다.
2학년 1반이었던 해준은 화요일과 금요일 5교시마다 운동장으로 나가야 했다. 미세먼지라는 게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던 시절의 하늘은 높고도 청명했다. 점심시간, 몇몇 친구들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은 해준은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구령대 난간을 잡고 서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놀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쉬는 시간 운동장은 수업 시간 교실과는 사뭇 달랐다. 규율과 감독이 부재한 혼돈의 시공간이랄까. 5교시 종이 치기 전까지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영혼은 그야말로 때가 묻지 않은 짐승 새끼 그 자체였다. 눈앞에 펼쳐진 전경은 저녁 무렵 9번 채널에서 방송하던 동물의 왕국을 방불케 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기분을 감추지 않으며, 본성 그대로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비슷한 힘을 가진 아이들이 주로 어울리며, 간혹 힘의 균형이 무너진 패거리가 눈에 띄곤 했는데, 해준의 지대한 관심은 후자였다.
자주 이목을 끄는 건 같은 반 최은영이라는 여자아이였다. 교실에선 해준과 비슷하게 혼자 있는 걸 선호하는 성향인가 싶었는데 1반, 3반, 5반, 7반이 한데 모인 운동장에선 또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최은영이 속한 무리는 7반인가 보았다. 다들 명찰 없이 운동복만 입고 있어서 이름은 모르겠지만 한 명은 키가 전봇대같이 크고, 다른 한 명은 밤마다 울면서 잠이 드는지 볼 때마다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있고, 마지막 한 명은 딱 보자마자 어머니가 즐겨 보는 일일 드라마에 나오는 어떤 남자 탤런트를 생각나게 하는 특징이 있는 외모였다. 셋 다 해준과 부딪힌 적 없는 여자아이들이었다.
교실에서의 최은영은 해준 못지않게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미였다. 지나가다 슬쩍 보면 자리에 없거나 만약에 자리에 있어도 다른 학생과 놀지 않고 혼자 연습장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짝꿍과는 가볍게 대화할지언정 다른 급우와는 깊게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회 연습 시간이 되면 전혀 딴판이 되었다. 자기 패거리와 합류한 최은영은 말투도 행동도 확 바뀌었다. 없던 자신감이 생긴 목소리는 한 톤 높아졌고, 손짓과 몸짓도 과격하고 과장되었다.
해준이 지켜본 결과, 최은영이 속한 4명의 패거리는 7반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을 교묘하게 괴롭히고 있는 듯했다. 복사 붙여 넣기 한 듯 모두와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여학생의 시선이 향한 지점은 으레 땅바닥이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보다 더 떨궈진 시선 처리가 꼭 주인 잃은 강아지 같달까. 4명 중 키가 가장 큰 여학생보다는 작은 덩치였지만, 패거리의 나머지 세 명보다는 비슷하거나 컸다. 육체적으로 약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어째서 반격하지 못하는지 해준으로서는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달까.
반면 최은영의 행동은 부분적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사회적 정체성 이론에 따르면 평소에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개인도 자신이 속한 패거리와 함께 있을 때 내집단의 일원으로서 자아를 강화하고 자신감을 얻는다. 또한 군집 행동 동기에 따르면 최은영의 패거리는 내집단의 유대감을 강화하기 위해 희생양으로서 피해 학생을 괴롭히는 것일지도 몰랐다. 5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졌다. 곧 운동회 연습이 시작될 것이다. 해준은 구령대에서 내려와 두 줄로 선 2학년 1반 자리로 갔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현정무와 친하게 지내던 해준의 내집단은 자연스럽게 인평중학교가 아닌 미륵남자중학교가 되었다. 매번 열 명이 넘는 10대 청소년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이따금 부산 남포동이나 서면에 가서 놀기도 했는데 그럴 땐 부산을 잘 아는 3학년 선배들과 동행했다.
그때 통성명한 인간이 바로, 부산을 자기 나와바리라고 떠벌리고 다니던 이병진이었다.
부산은 자갈치 시장에서 파는 활어 그 자체였다. 사납지만 생명력이 넘쳤다. 통영 시내 주말과 비교하면 열 배, 아니 백 배는 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남포동에서는 자칫하면 일행을 놓칠 수도 있었다. 시각적 소음처럼 느껴지는 휘황찬란한 간판 아래 줄지어 늘어선 포장마차들,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인간 물결. 거리 곳곳에선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거칠게 오고 가는 말들이 쉴 새 없이 고막을 때렸다.
일요일 오전, 극장가 앞 광장 같은 도로에선 별의별 상품을 다 팔고 있었다. 신발, 옷, 벨트, 책, 화장품, 액세서리, 장난감, 카세트테이프, 선글라스, 쥐포, 오징어, 그리고 율무차와 커피. 해준의 일행은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골목에서 더 골목으로 들어가야 있는 소규모 극장을 찾았다.
간판장이의 붓끝에서 탄생한 육감적인 배우가 번들거리는 입술 새로 고양이처럼 분홍색 혀를 내밀고 있다. 해준은 청불 영화를 싫어하지 않지만, 다 벗은 여자가 나와서 빨간딱지가 붙은 작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