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방학의 노랫말을 빌어 소개하자면 나는 '어딜 가든지 음악을 듣지만 그런 걸 취미라 할 수는'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전문성은 몰라도 들인 애정과 시간을 척도로 가늠한다면 나의 넘버원 취미는 '음악 감상'이다. 여행을 떠나서도 다르지 않다. 목적지에 도착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반복해 듣고 싶은 노래가 생긴다. 이런 곡들은 어떻게 떠오르는 걸까? 어떤 노래들이 특정한 도시, 특정한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걸까?
지금 있는 그곳에서 만들어진 음악, 그곳 출신의 아티스트가 빚어낸 노래를 듣는 것. 약간의 정보만 있다면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경우다. '신토불이'라 쓰니 어째 살짝 구수하게 '본토에 가면 본토 것을 즐겨야쥬'라고 외쳐야 할 것 같은데, 의지로 하는 일은 아니고 대개 현지의 곡들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식이다. '파리 가면 바게트 한 번 먹어줘야지' 같은 느낌으로 '파리에서 Daft Punk 한 번 들어야지' 같은 생각이 스치는 것이다. '서울' 하면 '치맥 먹고 BTS 한 번 들어줘야지'가 되려나. 음악도 여느 산물처럼 원산지의 문화, 언어, 환경 영향 아래에서 즐길 때 시너지가 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들을 땐 100% 와 닿지 않던 곡 특유의 무드도 여행지의 풍광과 날씨와 어우러지면 온전히 납득이 가는 때가 있다. 곡의 만듦새가 국적과 꼭 맞지 않는 모호한 것이어도 좋다. 애정하는 노래가 탄생한 땅에서 그 곡을 들으며 길을 걷는 건 자체로 꽤 낭만적인 경험이 되니까.
이번에 마드리드에 머물 때 많이 들었던 아티스트는 Pajaro Sunrise였다. Pajaro Sunrise는 스페인 출신의 어쿠스틱 포크 프로젝트 팀으로, 2006년 데뷔 앨범을 낸 이래로 마드리드를 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2012년 파리에 머물 적 처음 그들을 알게 됐던 앨범 <Old Goodbyes>의 몇몇 곡을 무척 좋아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좀 더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의 노래 'Automatic'이나 'Hungry Heart'(브루스 스프링스틴 커버)를 자주 들었다. 아마 그때보다 혼자인 시간이 덜 외로웠나 보다. 동이 다 트지 않은 때에 잠에서 깨 나른한 비감이 묻어있는 목소리를 듣자면, 시차 적응이 덜 돼 몽롱한 새벽도 퍽 분위기 있게 느껴졌다. 그대로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다 잠이 오면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느지막이 다시 일어나 노래에 맞춰 슬렁슬렁 나갈 준비를 하는 게 아침 일과의 전부였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끄고 에어팟을 귀에 꽂은 채 방을 나서면, 이어 흘러나오는 노래는 요란하지 않은 마드리드의 골목들과도 꽤 잘 어울렸다. 내게 Pajaro Sunrise는 팀 이름처럼 해가 뜬 시간, 마드리드의 잠잠한 아침과 낮을 채워주는 선율이었다.
나는 주변 시야가 좁고 곁의 사람에만 집중하는 편이라 ‘방금 봤어?’ 같은 질문에 거의 답을 못하는데, 주변에서 배경음처럼 흘러나오는 음악에는 귀가 밝다. 드라마나 예능에 삽입된 노래도 빨리 캐치하고, 카페나 식당을 가면 ‘선곡’으로 그곳의 인상을 점치기도 한다. 재방문을 결정하는 데는 물론 다른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지만, 분위기를 해칠만큼 선곡이 별로인 곳을 다시 간 기억은 드물다.
공간을 채운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게 습관이다 보니 종종 의외의 곳에서 맘에 쏙 드는 노래를 낚아 올리곤 한다. 마드리드의 Acid Cafe에서 들은 Kool and the Gang의 'Fresh'가 그 예다. 티센 미술관을 둘러본 뒤 프라도 미술관에 가기 전 잠시 들른 카페는 꽤 힙했지만 음식의 맛이나 선곡이 썩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멋진 댄스곡이 흘러나오고, 빨간 줄무늬 옷을 입은 직원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춤추듯 카운터를 가로질러 간 순간부터는 달라졌다. 좋은 음악은 장소를 선명히 기억하게 한다. 여정 내내 반복해 들었더니 이제 'Fresh'하면 내 시야에 맞게 편집된 카페 내부 모습, 그리고 마드리드와 포르투의 숙소와 몇몇 골목들이 눈에 그려진다. 미끄러지듯 숙소를 누비며 외출 준비를 하는 내 모습과 괜스레 리드미컬하게 길을 걷는 나의 모습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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