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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세 Feb 23. 2020

여행지의 플레이리스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

    '여행지의 플레이리스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에서 이어집니다.



03. 우연히 운명적으로 되살아나는 노래



    사실 이 경우 때문에 글을 쓰기로 맘먹었었다. 이미 알던 노래가 특정한 순간에 불쑥 찾아들며 나에게 새로운 존재감을 빛낼 때가 있다. 우연이 그럴싸하게 개입하면 그림은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마드리드에서 포르투로 넘어와 시내로 들어오니 이미 늦은 밤이 돼있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만나 나흘간 묵을 숙소 체크인을 하고 소파에 털썩 몸을 뉘이니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공항에 가기 전 이른 시간 브런치를 먹은 게 다였고,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오후라 둘러볼 곳 살 것을 찾아 종일 바삐 돌아다닌 후였다. 전날 매섭게 바람이 불 때도 부지런히 움직인 탓인지 몸에 미열도 있었다. 밖으로 또 한 번 나설 만큼 좋은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요기를 하고 약을 먹는 게 나을 듯했다. 마침 숙소 근처에 프란세지냐(치즈와 햄이 곁들여진 포르투갈식 샌드위치) 맛집이 있다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숙소는 시내의 꽤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포르투'하면 딱 떠오르는 도루 강이나 관광 명소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식당도 마찬가지여서, 밥을 먹으러 갈 때까지 내가 지나는 곳들은 몇 시간 전까지 머물던 마드리드와 겉보기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물 외관이나 돌길의 모양새, 가로등의 배치와 불빛까지도 내가 다른 나라로 넘어왔음을 전혀 실감케 하지 못했다. 식당 직원들이 영어를 잘하고 나에게 좀 더 호기심을 보이는 데서 살짝 환기가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포르투에 대한 인상의 조각은 선명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기다란 바에 멀뚱히 앉아 아무것도 모를 도시에서 첫 끼니를 때웠다. 맥주를 한 잔 곁들였더니 식당을 나설 즈음엔 두 볼에 열이 조금 더 올라온 느낌이었다.


    여전히 감 잡을 수 없는 이 새로운 도시를 조금이나마 탐험해 볼 요량으로 나는 아까와는 다른 길로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다. 외투를 여미고 목도리를 두르고 이어폰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적확히 쓰자면,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끼고 걷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제 이야기할  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이날 밤 노래를 들으며 돌아왔다는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내 귀에는 어떤 곡들이 랜덤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몇 분째 생전 처음인(그러나 이미 익숙하거나 특색이 없는 모양새의) 비좁은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순간 Bayonne ‘Lates’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정확히 같은  순간 발 한 짝을 뗀 내 앞에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내 왼편으로 전에 보지 못한 널찍한 길이 쭉 뻗어 있었고,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밝혀진 그 길 끝에서는 강 내음이 실린 바람이 불어왔다. 고개를 드니 물새들이 힘차게 울며 어지러이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을 채운 건 하얀 새들의 울음소리와 ‘Lates’에 담긴 묵직한 피아노 연주와 여음,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포르투만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곧이어 등장하는 드럼 소리에 맞춰 심장이 마구 뛰는 듯했다. 날이 밝으면 마주할 시야 밖의 풍경이 비로소 기대되기 시작했고, 고요한 밤에 도착해 이 같은 장면을 만날 수 있음에 기뻐졌다. 한 발 내디뎠던  순간에 우연히 이 곡이 재생되지 않았다면 감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Lates'의 풍성한 선율은 신대륙에 다다른 탐험가에게 미지에의 희망을 품게 하는 신호탄과 같았고, 곡 전반을 장악하는 비트는 두근거림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돕는 구보 음이 되었다. 이 곡이 있어 나는 그 길에서 다시 여정을 준비할 든든함을 얻었다.



    음악이 한 풍경을 특별하게 기억하도록 만들었듯이, 여행지 역시 음악에 새로운 이미지를 불어넣는다. 낯선 곳을 떠돌며 음악을 들을 때 함께 흡수하는 강렬한 자극들이 원래 내가 그 곡에 대해 지니고 있던 심상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Lates'라는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건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 곡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주로 그 시간과 닿아있었다. 이 노래가 쓰인 대목에서 (좋은 사운드트랙이 나온 데 놀라며) 서로를 쳐다본 눈빛, 영화가 끝나고 불을 켰을 때 모니터 주변의 크림색 빛깔, 음악과 연출이 좋았던 장면을 다시 보려 열심히 리모컨 각도를 조절하는 손끝, 그 옆에 웅크려 앉아 가르랑대는 반려동물과 같은 것들. 비교적 일상적인 맥락에서 빚어진, 무척 사소해서 아름다운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포르투에서 그 순간을 거치며 이 곡은 이전보다 웅장하고 운명적인 시그널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마주한,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산뜻한 풍경 안에서 새롭게 소화되기 시작했다. 초봄 같은 바람과 부서지는 햇살, 매일 매 시 달라지는 하늘색들이 이 노래에 스며들었다.


여행 이후 이 노래에 함께 덧입혀진 그림들 



    강렬한 자극과 소소한 추억, 결코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비일상적인 것이 일상적인 것을 압도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좋아하던 음악이 심드렁하게 들린다면, 또는 얽힌 기억 때문에 아끼던 노래를 꺼내 듣지 못한다면 참 서글픈 노릇이다. 이럴 때 여행을 떠나서 다시 음악을 듣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운이 따른다면 우연히 운명적으로 다시 아름답게 살아날 테니까. 노래가 덫이 아닌 따뜻한 빛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며, 다음 여행에도 에어팟을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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