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경주빵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가출할 수 있다!

by soojin

아니 왜 대구에서 경주빵을 팔지? (가까워서 그렇단다)

9000원에 고퀄리티 경주빵 안에 잔뜩 들어있는 팥고물이 달다.


사실 엄마가 캐나다에 두 달 예정으로 방문했는데 갑자기 가벼운 뇌졸중이 와서 그 비싼 캐나다 응급실(의료보험이 없는 외국인에겐 하루에 거의 만불을 받아낸다 한국 돈으로 천만 원!)에서 하루 밤을 지내다 닥터에게 한국에 가도 될 만큼 가벼운 증세라고 사인을 받아 낸 뒤로 급하게 한국행 비행기에 같이 올랐다. 한국의 호텔 수준의 병원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에서 간단한 시술과 9일간의 병원 생활을 맞히고 엄마 병시중 명목으로 엄마집에서 한 달간 지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삼 주일쯤 지났을 때 엄마가 나한테 “어휴 빨리 너는 너희 집에 갔으면 좋겠어”라고 한 말에 적잖이 섭섭해서 가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떻게 딸한테 그렇게 말을 해 아직 출국하려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너무해!"


지금에서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엄마의 생활을 너무 무시했다.

"음식은 싱겁게 먹어야 해, 엄마 이런 것들 쌓아두지 말고 다 버려!" 라며 냉장고 속 켠켠이 챙겨 둔 젖깔이며 장아찌들을 내 맘대로 버리고 정리했다. 냉동고 안에 검은 비닐봉지 안에 쌓인 떡의 정체를 물었더니 작년 송편이란다.. 다 먹을 거니까 아무것도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몰래 버린 딸년이 꽤나 꽤 심했던 모양이다. 사실 처음도 아니고 나는 한국에 올 때마다 말 안 듣고 내다 버리는 안하무인 둘째 딸이었다.


엄마의 노여움과 둘째 딸의 서러움 사이에서 나는 지인이 사는 대구로 호 의롭게 가출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지역에 아는 지인이 세명이나 되더라 그래서 연예인 뺨치는 스케줄을 짜서 아침저녁으로 약속을 잡고 만났다.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시작한 오돌오돌 감기기운이 삼일 내내 나를 힘들게 했다. 사실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약을 먹어가며 견디었다. 밤에는 목도 더 붓고 눈에서 열도 났다. 뭔 놈의 감기를 한 달 새 두 번이나 앓냐 ㅠ

그 꼴랑 감기도 이렇게 아픈데 뇌졸중이라는 무시무시한 시한폭탄을 안고 10시간 비행을 한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무리 호텔 같은 병원이라고 간단한 시술이라 하지만 허벅지 반이 멍이 든 시술과 10일 가까운 병원생활이 얼마나 갑갑하고 힘들었을까... 나는 그때는 잘 몰랐다.


가출하고 며칠 동안 엄마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 아니 일부러 안 했다. 소심한 복수 같은 것일 거다.

지인이 자기도 엄마랑 싸운 이야기를 할 때도 그냥 심드렁하게 그래그래 하고 성의 없이 답했던 것 같다.


세상 어느 딸과 엄마이야기는 너무도 진부하고 특별할 것이 없는 애증의 관계라는 건 이제 다들 아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은 세상의 둘째 딸과 나의 엄마만 특별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왜 그랬어 나 어렸을 때“라고 따지면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 “라고 차갑다 못해 쿨한 80세 엄마를 보고 이제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지 오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기 나이만큼의 기억의 조작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나는 자식일이라면 앞뒤 안 가렸다고”하거나 “나는 평생 자식만 보고 살았다”같은 정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상황들이 생긴다. 하나하나 반박해서 조작임을 밝히고 싶지만 내가 참기로 한지 오래다. 왜냐하면 엄마를 괴롭혀서 내가 얻는 게 없기 때문이다 대신 “어휴 어마어마했지”라고 받아친다.


미운 8살 엄마가 좋아하겠다. (나는 80세 엄마를 이렇게 부른다)

경주빵을 사는 내 모습에 호 의롭게 가출한 것이 무색해진다.


“아고 경주빵 엄청 달다”

라고 말하는 엄마는 보지도 않은 티브를 틀어 놓은 거실에서 듣는 둥 마는 둥 대꾸도 않는 나는

(소심한 나의 복수) 작은방에서 우리는 또 같이 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공항에서 잘 가라고 인사하고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찔끔거릴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위태롭게 동거 중이다.


엄마

무서운 병명을 듣고도 10시간 비행을 견디어 준 것도 무사히 한국병원에 입원한 것도 세상이 다 아는 둘째 딸 지랄 같은 성격을 이해해 주는 것도 너무너무 고마워.

이젠 장아찌 안 버릴게 용서해 주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01. 캐나다 아줌마 한국 방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