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와 케이티는 일주일 정도 짧고 굵게 머물고 떠났다. 서로 왓츠앱 번호와 인스타그램 아이디까지 교환했지만 아쉽게도 현재 연락은 끊겼다.
곧바로 미국 동부 메릴랜드(Maryland)에서 온 리아와 샘 커플이 도착했다. 둘은 2주 정도 머물며 닭장과 텃밭을 만들었다. 이런저런 공구도 잘 다루고 자연을 사랑하는 커플이었다.
리아는 내가 처음 만난 유대인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조금 무서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 꽉 막힌 편견 때문이었다. 그녀는 항상 쿨해 보였고 코 피어싱과 문신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걸 까칠하다고 받아들였던 것 것 같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문신은 아름다운 식물 덩굴이었는데 자연을 사랑하는 심성은 보지 못할망정 왜 그랬던 걸까.
리아와 샘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듯 커플 워커웨이는 다가가기가 조금 어렵다. 둘만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다 같이 친해지기가 어려운 데다 보통 커플은 커플끼리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워커웨이어들보다 친해지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리아와 샘은 멋들어진 닭장을 지어주고 떠났고 앨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닭을 키우는 아저씨에게서 닭을 몇 마리 얻어왔다. 나중에 카레에 넣어 먹을 거라고 농담하면서 유명한 카레 메뉴를 이름으로 붙여주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닭뿐 아니라 오리와 돼지도 키우면서 애지중지 보살피고 있다. 이후에 닭장 지붕도 새로 올려주고 색도 칠하고 문 잠금 장치도 만들어 한층 업그레이드 해주었다.
리아와 샘이 떠난 후 스코틀랜드에서 온 레이건이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세상 밝고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본인이 셰프 스쿨을 수료했으며 디자이너이자 모델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전체적으로 잘 웃고 말하는 걸 좋아했다. 나는 그의 유쾌하고 친근한 면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와는 갈수록 문제가 커졌다.
그가 게이라는 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할 만한 신체접촉은 삼가는 게 당연하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조심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는 곁을 지나갈 때 내 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몸을 붙인다거나 식사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으면 간간이 등에 손을 대고 쓰다듬는 등 불편한 신체접촉을 계속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으면서 나에게만 하는 걸 알고 나서는 더 불편했다. 결국 하지 말아달라고 말을 꺼냈다. 그는 사과하며 이제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음 날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식사자리에서 섹스 이야기를 꺼내거나 부적절한 사진을 보여주려 하고, 스무 살 갓 되어 동기들이랑 MT 온 사람 마냥 술을 마시려고 했다. 에런에게 몇 번의 거짓말도 적발되고 셰프 스쿨을 이수한 사람치고는 의심스러운 요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건이 도착하고 하루 뒤 뉴욕에서 온 댄이 도착했다. 댄은 여러모로 레이건과 다른 사람이었다. 재미있고 차분한 친구였다. 요리 실력도 좋고 프랑스어도 능숙했다. 그는 금융업계에서 일하다가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그만두고 아프리카 베냉에서 봉사활동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워커웨이를 하며 프랑스어를 연습하고 돈을 모아서 파리의 셰프 스쿨에서 공부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레이건과 댄이 도착한 주에 마침 에런과 톰이 독일에서 살던 집의 짐이 도착하는 날이 껴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바빴다. 에런과 나는 별채의 바닥 타일링을 시작했다. 시멘트 같은 점착제를 만들어 바닥에 펴 바르고 위에 열 맞추어 타일을 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이런 거 해볼 기회도 없었을 텐데, 내가 페인팅과 타일링을 좋아할지 누가 알았는가.
모두가 바쁘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을 조금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구가 도착하기 전 별채 정리가 끝나는 건 에런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가 5시 30분에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는 걸 듣고 나서는 댄도 크리스티나도 나도 최대한 도울 요량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더군다나 에런은 평소 힘들 정도로 일하기를 요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 날도 스스로 5시 30분에 일어날지언정 워커웨이어들에게 5시간 이상 일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워커웨이어가 즐기면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랐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프면 무조건 쉬라고 하며 누구보다도 워커웨이어를 생각해주는 유연한 호스트였다.
이에 반해 레이건은 자기는 여행을 온 거기 때문에 자기가 즐기는 게 무엇보다 우선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모두가 짐 도착일에 기한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일할 때 혼자 자전거를 타고 타운에 놀러 나가거나 거실에서 요가를 하고 있었으며, 말과 행동 모두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졌다. 독일에서 짐이 도착하기 하루 전 날, 바로 에런의 생일 전 날이었다. 레이건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부적절한 동영상을 틀어서 보여줬고 에런의 인내심은 다 닳아버렸다. 다행히 그녀의 딸아이는 평소보다 일찍 자러 올라갔지만 창문이 열려있었고 아이가 들을 수도 있었다.
“여기는 4살 아이가 함께 사는 가정집이라는 걸 기억해주세요. 최소한의 배려는 좀 해달라고요!”
그녀는 사정하듯 화를 내고 윗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레이건은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에게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이미 집 안에는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그의 행동은 조심스러워졌다. 전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내게 손을 대는 일도 없었고 부적절한 주제를 꺼내지도 않았다.
워커웨이는 호스트와 다른 워커웨이어들을 존중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게 열 중 팔이다. 호스트의 하우스룰이 얼토당토 않은 이상 규칙을 지켜야 하고 함께 생활하는 모든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일과 시간이 딱히 정해지지 않은 집도 있지만 정해져 있는 집도 있고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식사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도 있다. 워커웨이어에게는 워커웨이가 여행일지 몰라도 호스트에게는 일상의 한 부분이고 지속가능해야 한다. 후에 만난 어떤 워커웨이어처럼 "나는 집에서 설거지 매일 했는데 여기 와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라고 하며 다른 워커웨이어에게 떠넘기거나 레이건처럼 일방적으로 제공 받기만 하고 언행조차 조심하지 않는 경우는 큰 실례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그는 당시 친한 친구를 잃은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들어보면 사람들 다 자기 사정 하나씩은 있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이런 행동마저 받아줄 수 있는 호스트가 아니라 혼자 감정을 처리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워커웨이는 덮어놓고 아무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여행 방법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도 조심스럽다. 이 시리즈는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적인 여행기이면서 국내에 부족한 워커웨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안내서일 뿐이다. 호텔 가지 말고 워커웨이 하라고 하는 글은 아님을 명심하고 본인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여행법인지 신중히 판단하시길 바란다.
여행하면서 설거지하고 싶지 않다거나 맛있는 것 먹고 예쁜 것만 보고 싶다면 관광지에서 유명 식당을 돌고 호텔에서 자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고생 좀 할 각오도 있고 현지인들이 실제 사는 곳에서, 그들이 매끼 먹는 음식을 나누며 사람 사는 얘기를 듣고 싶다면 워커웨이가 잘 맞을 것이다. 레이건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뭐가 맞는지 판단을 잘못하여 휴양 여행 대신 워커웨이를 골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