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워커웨이를 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할까?

by 펜얼티밋

영어는 여행 내내 나의 콤플렉스였다.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 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영어를 듣는 것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고 학교에서도 시험 점수는 낮을지언정 리스닝은 잘하는 편에 속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름 외국 유튜버 영상도 보며 스피킹은 몰라도 듣는 데는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다고 착각했다. 대충 지표로 말하자면(시험은 특정 시험이 아니라면 실제 영어 실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독자분들에게 약간의 감이라도 주기 위해) 수능 영어 절대 평가 2등급, 대학교 원어민 영어 분반 수업 최상위반에서 A+, 외국 일상 유튜버 영상 60% 이해 가능한 수준이었다. 학교에서는 영어 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의 나라고 영어로 정치에 대한 논리정연한 주장을 전개할 정도는 안 되지만(물론 한국어로도 못한다) 그래도 지금 그때의 나를 평가해보자면 안타까울 정도로 못했던 것 같다. 실제 구어체에서 불필요한 건 생략하는 방법이나 한국식 직역이 아닌 영어식 문장을 만드는 방법 같은 건 몰랐고 "없애는 건 remove”처럼 특정 뜻은 무조건 특정 단어로만 표현했다.


첫 충격은 이 상태로 호스트 에런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왔다. 실제로 외국인과 영어로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는데 나름 잘되는 것 같던 리스닝조차 되지 않았고 입 밖으로 한 마디 꺼내기가 너무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한국어로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망했다는 걸 직감했다. 인터뷰 중간쯤 에런에게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에런과 여행 중 만난 모든 이들은 내가 처음 외국 나온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어를 한다고 했지만 스스로의 수준을 너무 잘 알기에 미안하기만 했다. 90퍼센트 이상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고 심지어 인사마저 되물었으니 말이다.


아직도 너무 창피해서 생생히 기억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원으로 나가는 길에 집으로 들어오는 톰과 마주쳤고 그는 지나가는 인사처럼 You alright? 하고 가볍게 물었다. 그냥 Good, thanks. You good? 하고 가볍게 대답하면 되는 걸 나는 Sorry? 하고 계속 되물었고 나중에 톰은 It’s okay. Never mind(괜찮아, 신경쓰지 마) 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식사 자리에서 주제조차 알아듣지 못할 때보다 이럴 때가 더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설명해도 넌 모를 거라는 듯이 누군가 Never mind라고 할 때. 분명 그는 바빠서 그쯤에서 포기한 것이겠지만 한창 영어 때문에 예민하고 주눅 들어 있던 내게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사건이 되고 말았다.


아마 일반 관광 여행이었다면 식당에서 밥 먹고 뭘 사고 다 괜찮게 했을 것이다. 아침마다 오늘 해야 할 일에 관한 짧은 브리핑을 듣고 각자 역할을 의논하고, 식사 자리에서 다섯 명 이상이 빠르게 대화를 주고 받는 걸 알아들어 틈을 봐서 내 말을 던지는 게 문제였지. 못 알아듣고 되묻기 싫었지만 언제나 그래야만 했다. 항상 그들의 원 바깥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농담도 던지지 못하고 항상 뭔가 뒤늦게 알아차려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해야 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오늘 계획이 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해서 마음대로 뭘 제안하지도, 개인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과 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평생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n개국어 하는 사람들을 동경해왔다. 크리스티나가 대표적이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와 스페인어 둘 다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한다. 가족과 통화하며 두 언어를 모두 자유자재로 번갈아 쓰는 크리스티나를 볼 때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언젠가는 나도 영어로 저렇게 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다 정작 영어를 완전한 외국어로써 구사하는 필을 만났을 때는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스웨덴인 아버지와 덴마크인 어머니를 둔 그는 덴마크어와 스웨덴어를 둘 다 하고, 거기에 영어와 프랑스어까지 할 줄 알았다. 프랑스어는 아직 어색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당시 내 영어보다는 나은 것 같았고, 그의 문장은 내 한국식 직역 영어보다 몇 단계 위인 진짜 영어식 영어였다. 어휘 수준도 높았고 농담도 다 알아들었으며 여러 명이 바쁘게 대화하는 식사 자리에도 잘 녹아들었다. 질투도 나고 내 영어 실력이 너무 보잘것 없어 보였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나를 주눅 들게 할 줄 몰랐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습니다. 워커웨이를 떠나고 싶다면 영어를 어느 정도는 하셔야 합니다.”가 되겠다. 편하게 프리토킹하는 수준일 필요는 없다.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기초 문법과 디즈니 겨울왕국에 나오는 단어의 반만 알아도 충분하다. 내가 추천하는 수준 측 방법 중 하나는 유튜브의 토크쇼 클립이다. 누구든 유명 배우의 이름과 인터뷰를 뒤에 붙여서 'James McAvoy interview'처럼 영어로 검색하면 영국과 미국의 유명 토크쇼 클립이 3분짜리에서 길게는 10분짜리까지 나온다. 아무거나 하나 틀어서 자기가 몇 퍼센트 정도 이해하는지 들어보면 실제 원어민들이 나누는 대화를 얼마나 이해할지 대강 예측할 수 있다. 적어도 50퍼센트 이상은 들리는 상태에서 가시길 추천한다. 반만 알아들어도 어느 정도 대화는 가능하다. 물론 리스닝과 스피킹은 또 별개의 문제이기에 스피킹 연습은 따로 하고 가야 한다.


출국 전 가장 추천하는 방법은 쉐도잉이다. 좋아하는 영화의 대사를 한 줄 듣고 뭐라고 하는지 영어로 정리해본다. 잘 안 들리는 부분이 있다면 열 번, 스무 번 같은 대사를 계속 듣는다. 어느 정도 완성된 것 같아서 더는 들어도 모를 때 대사를 확인한다. 자막을 보며 다시 들어보고 어떤 부분을 못 들었는지 확인한다. 모르는 단어나 문법이 있다면 검색해서 정확히 알아본다. 단어는 영한 사전에 검색하는 것보다 구글에 영어로 'commandeer definition'처럼 영어로 검색하는 게 좋다.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세계와 마찬가지이고 다른 언어와 일대일 치환이 불가능하다. commandeer를 단지 ‘마음대로 가져다 쓰다’라고 번역할 수 없듯이 영어 단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어로 쓰인 설명을 보며 단어의 느낌을 잡는 게 중요하다. 함께 나오는 예문도 읽어서 이런 상황에 쓰는구나 감을 잡아가야 한다. 모르는 단어를 다 찾고 나면 열 번 이상 대사를 따라 하며 배우의 리듬과 강세를 입에 붙인다. 안 보고 따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머릿속에 대사가 완전히 박히면 영화를 틀어놓고 배우의 속도에 맞춰 대사를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야 한다. 그게 되면 다음 대사로 넘어간다.

2초짜리 대사에 30분이 걸려도 괜찮다. 이 방법은 원어민이 실제로 말하는 발음과 강세를 익혀서 리스닝에도 도움이 되고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단어를 기억하게 해서 어휘에도 도움이 되며 문장을 통째로 머릿속에 넣어 원어민처럼 말하는 연습까지 하기 때문에 스피킹까지 도와준다. 핵심은 무한 반복이기 때문에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어바웃타임(About Time)'과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걸 귀국 후 해서 문제지, 출국 전 하고 갔으면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을 것 같다.


그럼 워커웨이를 하는 동안은 저절로 영어 실력이 좋아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24시간 외국인에 둘러싸여 영어로 모든 걸 처리하면 알아서 프리토킹이 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신경을 곤두세워서 반복되는 단어를 캐치하고 물어보거나 따로 찾아봐야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다. 모르는 걸 모르는 채로 놔두고 알려고 하지 않으면 늘지 않는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스트레스만 엄청 받을 뿐이다.


내가 직접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늘었던 건 따로 시간을 내서 하루 한 시간 이상 영어 소설을 가지고 공부할 때였다. 이후 코로나 때문에 영국 워커웨이 호스트와 길디 긴 시간을 함께 보낼 때 '그해, 여름 손님(Call Me By Your Name)'책을 사서 문장과 표현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넣으며 공부했다. 한 페이지 정도는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고 그렇게 20페이지 정도만 했는데도 스피킹을 할 때 고를 수 있는 어휘의 폭이 넓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문장이 이해되지 않거나 아무리 검색해도 문맥 속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원어민 찬스를 써서 영국인 호스트에게 물어봤다. 배운 표현을 써먹는 건 물론, 모를 때 바로 물어볼 수 있는 원어민과 함께 사는데 이 기회를 잘 써야 한다.


여행 전체 스트레스 중 언어로 인한 스트레스가 반 이상이었던 것 같다. 스트레스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배운 것도 많다. 생활 모든 게 영어다 보니 인터넷 검색과 유튜브 검색 또한 자연스레 영어로 하게 되었고, 전과 비교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 접할 수 있는 기회의 양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어떤 창문으로 세상을 보느냐와 비슷하다. 창문의 크기, 방향, 모양에 따라 세상이 천차만별로 다르게 보인다. 영어를 내 창문에 추가함으로써 일단 창문의 갯수가 늘어난 건 물론이고 두 번째 창문은 벽 한 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이런 정보와 기회를 태어남과 동시에 누리면서 살아왔구나 조금 질투도 난다.


긴 여행의 끝에서 영어를 하루 종일 듣고 반응도 영어로 하는 데 나름 익숙해졌다. 여행 초반에는 누군가가 Good morning, how did you sleep? 하고 물어보면 어버버거리면서 말문이 막히곤 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Good, thanks. How are you? 라고 바로 대답하고, 한국식 문장에서 직역한 문장이 아니라 영어식 표현을 가진 문장을 자연스레 만들어냈을 때 그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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