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MBTI도 말해주지 못하는 나를 알아가기 시작하다

by 펜얼티밋

첫 호스트 에런은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 사는 영국인이었다. 기차역 주차장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유쾌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30여 분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이 본채 말고도 별채와 넓은 정원이 있다.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다 건강 문제로 휴직 중이었고 이곳에 오래된 3층짜리 집을 사서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독일에서 일하는 동안 큰 집과 정원을 관리하며 4살짜리 딸의 육아를 혼자 맡아 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에런은 진심으로 워커웨이어들을 신경썼다. 항상 무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고, 일은 괜찮은지 물어봐주었다. 워커웨이어들이 본질적으로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센스 있게 가끔 데리고 나가주기도 했다. 날씨 좋은 주말에는 근처 타운 마켓에 같이 놀러가거나 강가에 갔다. 그녀의 친구들이 왔을 때는 해변 당일치기 여행에 워커웨이어들을 데려가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독자분들이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편하게 해주고, 여기저기 구경 시켜주고, 센스있게 모든 걸 조정해주는 호스트는 흔치 않을 뿐더러 그게 호스트의 의무도 아니다. 억수로 운이 좋게 휴직 중이고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고 사람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줄 수 있는 호스트를 만났을 뿐이다. 이런 호스트를 만난다면 호스트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주시고, 아니어도 호스트가 할 도리를 잘 해준다면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잘해주시라.

요리는 돌아가면서 했다. 집에 항상 4명 이상의 워커웨이어가 있었기 때문에 냉장고에 블랙보드를 붙여 요리하고 싶은 요일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한 명의 이름이 적혀있더라도 에런네 집에서 요리는 항상 다 같이 하는 느낌이었다. 이름을 적은 사람이 주방장이 된다면 다른 사람들은 보조가 되어 노래를 틀어놓고 당근을 썰었다. 함께 요리하며 웃고 떠드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었다. 단연 최고의 시간 중 하나였다.


프로젝트 초기의 별채 1층이다. 어마무시하게 바뀔 예정


본채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별채를 에어비앤비로 내주기 위해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페인팅, 타일링, 가구 재배치, 청소 등을 주로 했는데 이런 쪽에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쭈뼛쭈뼛하고 서툴렀다. 페인트를 칠하는 본 작업보다 그 전에 벽면의 구멍을 메우고 사포질을 하는 등의 준비 과정이 최종 페인팅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도 몰랐고 오일 페인트는 특수 용액으로만 지워지기 때문에 작업 장갑이 필수라는 것도 몰랐다. 도착한 다음 날 에런이 처음부터 하나하나 알려주었고, 나는 별채의 벽지를 물에 불려서 벗겨내고 회반죽으로 벽의 구멍을 메우는 것부터 페인팅을 배웠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크리스티나는 앨리스의 딸 바이올라의 베이비시터로 일했고, 캘리포니아에서 온 친구 알렉스와 케이티가 나와 함께 별채에서 일했다. 나 빼고 다들 능숙했던데다 내 영어 실력이 심각했던 때라 방해만 됐던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걸 시도하고 하나씩 새로운 스킬을 배워가는 게 워커웨이의 매력이기도 하다. 집도 없는 내가 언제 페인팅해보고 욕실 바닥을 타일링 해보겠는가.


내가 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새로운 걸 시도해서 나를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방구석에 앉아 내가 뭘 좋아할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실제를 알 수 없다. 핵심은 직접 해보는 것이다. 해봐야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항상 하던 것만 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취향인지 알던 것만 안다. 여행을 떠나면 새로운 것들을 하게 된다. 크루아상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프랑스에서 인생 크루아상을 만나고 나서는 크루아상을 좋아한다는 것을, 동물 돌보는 일은 끊임없이 신경을 세워놓아야 해서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내가 가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을, 혼자 하는 여행을 즐기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을, 코코넛 맛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지에서는 좀 더 오픈된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게 되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새로운 나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놓고 아무 걱정 없이 한 면을 깔끔하게 채우는 데만 열중하다 보면 지루하지 않고 뿌듯하기까지 하다.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또는 그저 호스텔을 돌아다니며 관광지만 보는 여행을 했더라면 나를 알아가는 범위에 한계가 있었을 것 같다. 반면 워커웨이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자신을 모르는 답답함에 여행을 떠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나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을 던져본 후 내가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실험하는 여행이 효과적일 것이다.

새로운 곳에 녹아들어 나의 낯선 부분을 발견하는 일은 때로 창피하기도, 어색하기도 했다.

새로이 발견한 나의 모습이 싫을 때도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잘 이어나가지 못하고 아이와 잘 놀아주지 못한다.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여 일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을 오래 끌기도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했을 모습이니 좋든 싫든 알고 있어야 한다. 그걸 알아야 고치든 냅두든 하기 때문에 일찍 알수록 좋다. 평소에는 객관화하기 힘들었던 나의 모습을 관찰하기 쉬워지는 게 여행이다. 낯선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거기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 그건 취향일 수도 나의 강점과 약점일 수도 있다.


선탠은 격렬하게 싫어한다


여행 초반에는 언어 장벽을 강하게 느껴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았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고작 이것 때문에 우울해지는 나한테 다시 실망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길 실망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실망했다면 정신 다잡고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만 집중하면 된다. 근데 말이 쉽지 그게 될까. 7월, 프랑스에 막 도착한 여행 초반에는 내 영어가 부족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따로 시간을 내어 영어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귀국하면 진짜 열심히 할 거야 라고 생각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주변에 물어보고 연습할 원어민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 기회를 왜 날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난 어리석게도 첫 번째 기회를 날려버렸다. 진정 마음 다잡고 영어 공부를 했던 건 다음 해 3월 영국에 두 번째 갔을 때부터였다. 이후에 나올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영국 호스트에게 질문 폭탄을 던지며 하루 1시간씩, 많게는 3시간까지도 영어 공부를 했다.

이렇게 여행 중에는 자신의 모자란 점, 강한 점, 의외의 취향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점을 발견했다면 좋은 거고, 취향을 발견했다면 그것도 좋은 거고. 여행은 나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모아가는 과정이다.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 노트 앞부분에 '여태까지 알아낸 나' 챕터를 만들어 여행 내내 나에 대한 백과사전을 만들어가는 마음으로 자잘한 것까지 적어놓았다.


- 외국어 말하기를 좋아한다(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 주기적으로 특정 장소에 가는 걸 싫어한다.

- 한국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 다른 사람의 기준이 나의 기준보다 옳다고 생각한다. 개선필요*

- 책, 서재, 차, 펜, 그림, 편지지, 목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 코코넛 맛을 싫어한다.

- 혼자 사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개인 방은 필요하다.

- 피부 수분이 기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오후에 로션을 바르지 않으면 기분이 안 좋아질 수 있다.

- 생각보다 넉살이 좋다.


이 습관은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과 동시에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참고하기 좋다.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를 알아야 내게 맞는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처음에 이 코너를 위한 장을 두 쪽밖에 남겨놓지 않은 게 아쉽다. 지금은 틈새 여백을 비집고 들어가며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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