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에게 가장 만만한 해외 휴가지는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따뜻하고 놀 거 많은 가까운 곳이다. 에런이 프랑스 시골 지역에 사는 덕분에 종종 놀러 오는 그녀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프랑스에 있었지만 영국인과 미국인을 가장 많이 만났다.
그 중 가장 기억나는 그녀의 친구들은 닉과 애쉬 부부다. 영국인-미국인 커플인 그들은 당시 파리에 살고 있었다. 가끔 투닥투닥 귀엽게 다투다가도 서로 사랑한다고 하며 안아주는, 따뜻한 마음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겁은 많지만 귀엽고 사랑을 부르는 유기견 카슨도 입양해 키우고 있었다.
하루는 다 함께 날을 잡아서 오마하 해변(Omaha Beach)에 갔다. 오마하 해변은 프랑스 북서부 해안가로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를 연합군 부대가 되찾기 위해 노르망디(Normandy는 프랑스 북서부 주의 이름이다) 상륙작전을 펼친 곳이다. 해변은 맑고 깨끗해서 수천 명의 피로 뒤덮였을 당시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바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푸르렀고 동시에 끝없는 하늘과 맞닿아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고 당시 존재했던 참호도 보존되어 있었다. 해수욕장처럼 놀러 오는 관광지는 아니었던 것 같고 관광객들도 대부분 전쟁의 족적을 따라 오는 것 같았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떠올랐다. 드라마적 요소를 위해 과장이 있었겠지만 영화 속 오마하 해변의 바닷물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찢어진 팔과 다리, 한때 생명이 있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잔혹한 모습의 시체가 진흙 범벅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대체 어떤 마음가짐이었기에 죽을 걸 알면서도 전진하고 명령에 따를 수 있었을까. 너무나 치열하고 처절했다. 죽은 동료는 미련 없이 두고 가고, 크게 다쳐 가망이 없는 동료도 두고 가고, 적의 군복을 입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죽였다. 그러나 동시에 동료를 믿고 서로의 목숨을 책임졌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해나갔다. 전쟁은 인간성의 말살일까, 인간성의 발현일까? 그렇다면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이들을 가차없이 죽일 수 있는 게 인간의 특성일까, 아니면 서로를 돕고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게 인간의 특성일까?
오마하 해변에서 떠올린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인간성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인간은 입체적인 동물이다.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듯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역사가 무수히 증명한 것처럼 인간은 상대의 것을 빼앗아 더 잘 살 수 있다면 가차 없이 상대를 정복하고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 빵 한 조각을 굶고 있는 친구에게 내어주는 등 선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악을 교육과 사회화로 약화시키고 내재된 선을 최대화시켜 도덕과 배려라는 사회적 규범으로 이어가고 있다. 전쟁은 상식이 재구성되며 이미 완료된 내면적 사회화가 훼손되는 과정이기에 괴롭고, 타고난 인간성 중 악이 발현되어 괴롭다. 결국 전쟁은 인간성의 말살이자 발현이다. 그렇기에 역사 속의 전쟁은 괴로우면서도 빈번했다.
우리는 해변의 독일군 참호를 돌아보고 근처에 위치한 미군 추모공원에 들르기로 했다. 오마하 해변 작전은 미군이 주를 이뤘고 여기서 기리고 있는 희생자들의 수가 9,388명에 달한다고 한다. 해변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공원은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최선을 다해 안치된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보이는 것 같았다.
추모공원의 본격적인 공간은 희생자의 이름과 출신 지역, 사망 날짜가 적힌 흰색 십자가가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 군번과 직급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전쟁의 말이 아니었다. 십자가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걸 위에 적힌 이름이 생생히 외치고 있었다. 다들 한 명 쯤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을 텐데 십자가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늘어서 있는 걸 보니 가슴이 먹먹하게 안타까웠다.
한국이 세계대전에 직접적으로 참전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았고, 따로 공부해 본 적도 없었다. 전 세계의 질서를 지금의 형태로 바꾼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동시에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한국도 광복을 맞은 전쟁인데 여태까지 알려고 한 적도 없다는 게 창피했다. 다른 문화권에서 지내다 보면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매 순간 깨닫는다. 특히 내 짧은 역사 상식은 통하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좌절감과 불타는 학습 욕구를 동시에 느꼈다. 오마하 해변에서는 아시아, 유럽, 미대륙, 아프리카, 호주까지 참전해 말 그대로 World War였던 세계대전을 통해 시각을 넓혀 간다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