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곳에서 석양을 본 적 있는가. 그리고 그 석양 아래 앉아 누군가가 내려준 커피를 마셔본 적 있는가. 우리는 인생을 통해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지는 곳에 다다르는 경험을 한 번쯤 한다. 그곳이 영원히 끝으로 마감될지 아닐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혼자만 아니라면 우리는 끝이라 명명된 곳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누구는 커피를 위한 영화라고 하고 또 누구는 여성을 위한 영화라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잔잔한 일본영화라고도 하고, 너무 밋밋해 평점이 박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아무렴 어떠한가. 커피 한 잔 생각나게 하는 영화면 충분하다. 희미한 옛사랑이 그러하듯.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은 실종된 아버지를 기다리며 커피가게를 연 미사키(나가사쿠 히로미)와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 에리코(사사키 노조미)가 서로를 통해 상처를 보듬고 일어서는 이야기다. 멈춘 듯 잔잔히 일렁이는 화면과 넘치지 않는 감정선으로 마음을 덮여주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여성을 위한 소소한 슬로우 무비 정도로 마침표를 찍기엔 왠지 허전하다. 인간의 결핍과 좌절은 어디서 오고, 우리는 어떻게 오늘 그것을 버텨내고 있으며, 어떤 선택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동화와 커피라는 소재를 빌어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를 버렸어. 나 때문이야”
주인공들을 감싸고 있는 현실은 결핍이다. 표면적으로는 부모의 부재, 특별히는 남성성의 부재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헤어져 살아온 미사키에게 아버지는 그리움의 대상이자 죄책감의 근원이다. 30년을 헤어져 살아온 아버지 시미즈의 법적 죽음을 받아들여 빚까지 고스란히 상속받고, 유일하게 남긴 창고 건물에서 카페를 열어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오래된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미련임과 동시에 함께 안타까움에 대한 보상이다. 실재적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와의 해후만이 그 결핍을 채울 것이라는 믿음이 그녀가 DNA 검사를 거부하고 카페를 떠나는 이유다.
싱글맘 에리코도 친부모나 아이 아빠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 인물이다.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지만 중학교 중퇴의 학력과 미혼모라는 제약으로 그 결핍을 타개할 방법은 남자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이 전부다. 이로 인해 그의 딸 아리사는 엄마라는 존재의 결핍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힘들어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벌레를 먹지 않고 이대로 굶어죽어야겠어”
미사키의 카페이름인 요다카는 쏙독새를 가리킨다. 쏙독새는 한국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야행성 새다. 외모가 추하고(매에 비해서) 어울리지 못하는 쏙독새를 자신의 처지에 대입시킨 이름이다. 그리고 이 이름은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미야자와 겐지의 단편소설(동화) <쏙독새의 별(よだかの星)>에서 가져온 것이다. 미야자와 겐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된 <은하철도의 밤>으로 더 유명하다.
1921년 무렵 집필되었다고 추측되는 작품으로, 겐지가 죽은 다음해(193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쏙독새는 아름다운 벌새나 물총새의 형이면서도 용모가 추악하고 볼품이 없는 까닭에 새무리에서 미움을 받고 매한테서도 ‘매’라는 이름을 쓰지 말도록 강요받아, 고향을 버린다. 스스로 살기 위해 많은 벌레의 목숨을 먹기 위해 빼앗아 온 것을 혐오해 그는 마침내 삶에 절망하고 태양을 향해 날면서 타 죽어도 좋으니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빈다. 결국 있을 곳을 잃어버리고 목숨을 걸어 밤하늘을 계속 날아다니는 쏙독새는 어느덧 파랗게 타오르는 ‘쏙독새의 별’이 되어, 지금도 밤하늘에서 불타는 존재가 된다.
학교에서 이 동화를 읽게 된 아리사는 미사키에게 “요다카랑 하나도 안 닮았어요. 아무데도 가지 말아요”라고 애원한다. 자신을 요다카에 대입하며 살아가는 미사키의 무의식은 자신이 판매하는 원두 블렌드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요다카(쏙독새), 하치스즈메(벌새), 가와세미(물총새) 세가지 모두 매가 아닌 비슷비슷한 처지의 새 이름들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들이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은 모두 깨어진다. 미사키의 아버지 시미즈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존재며, 에리코가 의지하고자 하는 남자는 돈만 뜯어내려하는 양아치일 뿐이다. 영화는 오히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그 결핍을 빚은 대상이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관계를 맺고 그 상처 입은 사람들 간의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사키를 폭행하려한 남자가 경찰에 연행된 후 간신히 참아내고 있던 미사키를 대신해 커피 내리는 방법도 모르는 에리코가 커피를 내린다. 갈등하던 두 인물이 화해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미사키는 혼자 지내왔던 어려움을 토로하는 한 마디를 던진다.
“누군가 끓여주는 커피는 이렇게 좋구나.”
커피는 영화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요소다. 아리사가 급식비를 낼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에리코가 키타자와의 술집에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도, 왕따를 당하던 아리사에게 친구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도, 현실의 고단함을 아리사의 담임이 수다를 떨고 힐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모두 커피가 가진 힘이다.
요다카 블렌드는 씁쓸한 맛과 묵직함이 특징이다. 달지 않는 초콜릿이라고 말하는 미사키의 대사를 미루어 짐작컨대 탄자니아 원두가 포함된 블렌드이며 미사키의 삶을 대변해 주는 블렌드이기도 하다.
“우리 엄마는 평소에는 친구처럼 재미있지만 화나면 무섭고 가끔은 아이들 마음을 이해 못하지만 외출할 때면 예쁘고 상냥하다”는 친구에게 아리사가 권하는 가와세미 블렌드는 어떤 맛일지 상상이 간다.
그녀가 매일 커피를 볶는 로스터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지금은 많이 눈에 띄지 않는 직화식 후지로얄로스터. 2000년대 초반에는 국내에서 로스팅을 하는 곳의 70% 정도가 후지로얄이었다고 할 정도로 널리 이용됐던 로스터다. 분당에서 규모를 키우던 K커피회사에서도 후지로얄이 돌아가고 로스팅을 배우려던 사람들이 상담을 하던 기억이 난다.
뉴웨이브 커피의 유승권 로스터의 말을 빌자면 “댐퍼를 이용해 들어오고 나가는 열을 잘 측정을 해야 하고 1차 그랙에서 2차 크랙까지 가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 모델이고 “로링이나 프로밧, 기센이 선호되고 현재는 많이 쓰지 않는” 모델이다.
뉴스를 통해 침몰한 배에서 건져 올린 유골 소식이 전해지고, 남겨진 유족들은 DNA 검사를 통해 아픈 기억에 마침표를 찍으려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미사키는 결국 요다카 커피를 떠난다.
“어디로 가나요?”
“몰라. 하지만 이 파도소리는 견딜 수가 없어.”
아무도 없는 바닷가 외딴 곳을 무서워하는 아리사를 위해, 그리고 떠난 미사키가 돌아오길 기도하듯 날마다 외등을 켜두며 그를 기다리는 에리코. 드디어 가족으로 다시 구성될 그들의 해후가 이어지고 요다카 커피와 야마사키 민박은 다시 문을 열게 될 것임을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결국 영화는 도피가 아니라 현실의 곁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결핍의 인생을 극복해나가는 것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삶의 답답함을 해결하는 것은 여성들간의 위로와 연대다. 치앙시우청 감독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사람과 사람의 교류, 관계의 소중함을 영화에 담고자 했다”고 밝힌바 있다. 미사키의 가게에서 일하는 에리코와 아리사간의 연대, 사고 가족들간 남은 여성들간의 심리적 연대, 학교 교사와 친구들의 위로와 손 내밈이 남자의 존재가 아니라 이들을 도피가 아닌 새로운 미래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 매개체는 바로 커피다. 그리고 커피가 멀리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오지만 커피를 볶는 이곳도 “손님에게 가기 전 잠시 들르는 것 뿐 종착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서로 서로가 끝없이 노력하고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영화는 도쿄에서 고향 이사카와현 노토반도의 스즈시로 돌아와 카페를 연 커피 로스터 니자미 요코의 이야기가 모티프다. 물론 영화의 배경이 된 스즈시에는 요다카 커피가 없다. 대신 도쿄 시부야에 미사키 역의 나가사쿠 히로미가 연 ‘요다카 커피’(www.yodaka.tokyo)가 있다. 도쿄 한 복판에서 쏙독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커피 한 잔 하는 것도 좋겠다.
참고 :
<미야자와 겐지 전집1>(너머刊)
쏙독새의 별. 일본판 위키피디아
<씨네21> 10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