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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Jul 31. 2018

기억에 대하여

다섯번째 이야기

컴퓨터를 교체했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일을 시작할 때 샀던 녀석이다. 원래 두 대였는데 성능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터라 오년 전쯤 한 대를 먼저 보냈다. 먼저 간 녀석의 메모리를 떼어다 남은 녀석에게 붙이자 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도 했다. 몇 년간 부팅에 난색을 표하는 일이 잦더니, 이번 여름 드디어 인사불성이 되었다.    

 제 몸을 돌려주던 운영체제가 몇 번이나 업그레이드되는 시절까지 살았으니, 장수했다. 무병은 아니었지만. 평생 필사만 하던 수도사가 컬러복사기를 쓰는 모양새였을 것이다. 천천히 분해해 하드디스크와 메모리만 떼어내고 떠나보냈다. 메모리는 만일을 대비해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하드디스크는 외장하드 케이스라는 신기한 물건과 결합해 생을 이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운영체제까지 돌리던 몸이었지만 이제는 단지 데이터만 저장할 뿐이다. 기억을 담는 그릇. 편집하는 일을 단지 보조하는 기능만 할 것이다.    


기억의 유무가 동일한 존재의 증거인가. 하드디스크에 담긴 기억으로 오래전 컴퓨터는 사리지지 않는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와 잊혀 질 것인가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컴퓨터는 기막힌 타협을 했다.    


새로운 몸체를 감당하지 못한 모니터도 창고라는 거처로 옮겨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것이 오면 늘 예전 것의 초라한 얼굴과 놓친 일들이 드러난다. 모르고 살았는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새로운 도구들이 일을 한다. 떠밀리듯 이루어진 세대교체는 성공적일까. 분명한 건 이번 세대교체에는 학연도 지연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병역면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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