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정리를 하다말고 숟가락을 깎습니다.
비교적 무른 소나무를 두 자루의 나이프로
밀고 당기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나무를 깎는 일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과
반대인 탓에 서툴기만 합니다.
무작정 덜어내기만 해서도
한꺼번에 많이 끝내려 해서도
밥 한 그릇 떠먹을 도구의 형체조차 만들기 어렵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계획의 반만 되기를 바라고서야
투박하지만 겨우 모양을 드러냅니다.
있으나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있으나 다르게 보아야 아름다운,
있으나 두고두고 살펴야 편안한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나무를 깎으며 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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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제1원 림보가 나옵니다.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이름을 따온 이 곳의 영혼들은
신체적 고통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국에 오를 희망이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사람은 현실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더 이상 변화가 없을 것이란 생각에
절망한다지요.
화분 속 나무 열매는 아직 푸른데
빨간 과육을 그려보는 것은
태풍이 지난 뒤에도 들에 나가는 농부의
마음과 비슷한 그 무엇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