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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깎으며

by 그뿐인숲



원고 정리를 하다말고 숟가락을 깎습니다.

비교적 무른 소나무를 두 자루의 나이프로

밀고 당기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나무를 깎는 일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과

반대인 탓에 서툴기만 합니다.

무작정 덜어내기만 해서도

한꺼번에 많이 끝내려 해서도

밥 한 그릇 떠먹을 도구의 형체조차 만들기 어렵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계획의 반만 되기를 바라고서야

투박하지만 겨우 모양을 드러냅니다.


IMG_2411.jpg


있으나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있으나 다르게 보아야 아름다운,

있으나 두고두고 살펴야 편안한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나무를 깎으며 다집니다.

.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제1원 림보가 나옵니다.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이름을 따온 이 곳의 영혼들은

신체적 고통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국에 오를 희망이 없는 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사람은 현실에 절망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더 이상 변화가 없을 것이란 생각에

절망한다지요.


열매따기그림_3.jpg


화분 속 나무 열매는 아직 푸른데

빨간 과육을 그려보는 것은

태풍이 지난 뒤에도 들에 나가는 농부의

마음과 비슷한 그 무엇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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