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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Oct 22. 2018

누가 詩를 말하는가?


詩人이 쓰는 것이 詩인가,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인가?    


시가 분노를, 절망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 시인은 용감했고 저항했으며 눈부셨다. 이제 시인은 떠났고 시는 침잠하며 세상은 경박하다. 풍요롭지 않으나 찬양하고, 공정하지 않으나 수긍하는 시대에 시를 찾는 일은 힘겹고 절실하지 않다.    


시인이 되려고 떠났으나 평론가가 되어 돌아왔다고 외치던 한 사람은 박학다식으로 세상을 저울질하다 수인(囚人)이 되기도 했다. 지적유희를 시라 믿었던 그 사람에게 처음부터 시란 과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시인이 되는 것이 시를 쓰는 것보다 쉬운 시대에, 시를 쓰는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인가.    


 삶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짐 자무시는 <패터슨>을 통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전혀 새로울 것도 없고 비루하거나 평범하거나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 섞여 반복되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대다수의 삶이다. 우리는 그 반복에서 일어나는 변주에 만족해야 한다. 아니면 반복을 견디든가 숨겨져 있는 디테일을 찾아내든가.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가는 도시 패터슨에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흠모하며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버스기사 패터슨이 산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매일 같은 경로로 버스를 운행하며 아내가 챙겨준 도시락을 패터슨 폭포에 앉아서 먹고, 밤이면 아내의 애완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 단골 술집에서 맥주를 마신 후 하루를 마감한다.    


영화는 모든 것이 반복이다. 길도, 시간도, 풍경도, 푸념을 늘어놓는 동료도, 심지어 우편함을 쓰러뜨리는 애완견의 행동마저도. 아내 로라는 새로움을 찾는 듯 보이지만 매일 집안에서 반복적인 예술활동을 하며 일상을 채운다. 동일한 패턴으로 커튼을 만들고, 가구를 색칠하고 컵케이크를 굽는다. 자신이 만든 커튼 속의 동그라미 패턴을 보며 “모든 원이 달라서 마음에 들어”라고 말하는 로라. 그러나 “스마트폰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패터슨과 달리 그녀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스마트폰이 필요하며, 그의 시 또한 사라질 것을 염려해 “10분이면 가능한” 복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화면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쌍둥이는 그 현실 속 반복의 상황을 강조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시를 구성하는 요소의 메타포다. 그 속에서 패터슨은 매일 자신의 시를 밀고 나간다. 틀린그림을 찾듯 반복되는 삶에서 작은 차이를 찾아내고 기록한다. 그런 그의 일상을 깬 유일한 사건은 애완견 마빈이 시를 쓴 노트를 찢어버렸다는 것. 반복되던 일상에서 발견하고 뽑아놓은 시가 사라진 순간 그의 일상은 여전히 평화롭지만 당혹스럽다.    


우연히 만난 일본인은 패터슨에게 시인이냐고 묻고 그는 버스운전기사라고 대답한다. 일본인은 유명한 시인들도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며 빈 노트를 선물한다. 시로 숨을 쉰다는 그는 “때로 빈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준다”고 말하고 떠난다.    


시가 들어있는 노트를 잃어버렸으니 그는 지금 시인이 아니다. 시를 쓰지도 않는다. 그가 시인이건 버스기사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빈 노트가 생겼으니 그는 다시 시를 쓸 것이고 하루는 또 반복될 것이다.   

  

삶이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또 한사람이 있다. 목수 남머루는 <카빙노트, 나무로 살림>을 통해 나무를 깎는 작업이 삶과 닮았으며, 반복되는 시간을 흘리다 멈추는 지점에 나무 살림도구의 쓰임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는 나무토막에 흐릿한 선을 긋고 같은 손놀림이지만 동일하지 않은 경로를 오가는 칼의 힘에 기대 작업을 한다. 같은 숟가락을 깎지만 매번 다른 숟가락이 나오고, 같은 힘을 주지만 다른 깊이의 곡선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반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관심이 결과물에 가있기 때문이다. 깎는 동안의 생각, 깎는 동안의 손놀림이 중요한데 그럴듯한 모양에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반복은 복제가 아니라 새로움을 드러내는 것이고 본래의 무늬를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칼들의 선이 쌓이고 쌓여 나뭇결도 흐릿해지면 그제야 얻게 되는 나무도마의 결이다. 시간의 결이다. 반들한 손자국도, 예리한 칼들의 선도 모두 엄마의 시간이 흘러간 흔적이다. 톱으로 썰고 사포질만 해도 만들 수 있는 도마지만, 굳이 칼로 깎는다. 시간이라는 칼을 받는 나무토막을 시간의 칼로 깎아 만든다.”    


그래서 시인 최규승은 남머루의 작업이 시인의 시작(詩作)과 닮았다고 말한다. “디자인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으로 이루어”져 나무에 새기는 시가 된다고 설명한다. “정했으나 정해진 대로 되지 않는 작업. 의도와 우연이 만나는 자연스러운 데에서, 남머루는 나무를 살리고 삶을 살린다”는 분석은 말로 해도 되고 사진으로, 그림으로 해도 되는데 굳이 시를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 같다. 시간의 작은 틈을 찾아내 견디는 힘을 알려주는 것은 나무를 깎는 일이나 시를 쓰는 일이나 같다.    


패터슨의 시작 노트와 남머루의 카빙 노트는 다르면서 같은 詩다. 시인은 떠나고 없지만 시를 쓰는 사람은 여전히 필요한 시대. 버스기사와 목수는 시간의 방향을 알고, 생각의 어제와 오늘을 엮을 줄 아는 사람이다.     


다시 묻는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인가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인가.

답은 당신에게 있다.    


#시 #詩 #영화 #패터슨 #책 #카빙노트 #짐자무시 #남머루 #버스기사 #목수 #우드카빙 #시인 #리뷰 #아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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