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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Mar 29. 2019

봄날, 존재의 슬픔을 마시다

오이디푸스와 그리스 와인, 말라고지아


 인간은 우연의 지배를 받으며 아무것도 분명하게 내다볼 수 없거늘
그러한 인간이 두려워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되는 대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인상 쓰며 앉아 있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도 아닌데, 그냥 웃으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에게 하는 저 말이 생각난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내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자식을 버리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에게서 자라게 된다. 성장해 자신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를 떠나 아폴론을 만나러 갔다가 자신을 알지도 못한 채 친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게 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의 왕이 되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만 결국 끔찍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스스로 눈을 찔러 자신을 저주하게 된다. 우리가 심리학에서, 수많은 변형된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속 주인공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다.    


오이디푸스를 곱씹는 일은 다분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었던 그는 자연 재해까지 해결할 수 있다며 집요하게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채, 헛된 노력을 기울인 셈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오만이라 비판하지만, 이오카스테의 대사처럼 순응하는 인간이길 거부하는 오이디푸스를 힐난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너희들은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 있을 지어다!


과연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말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불행을 막는 길일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위로 신에 대한 저항, 혹은 오만을 드러낸다. 하지만 눈을 찌른 것은 과연 자신이 한 것인가 이 마저도 신의 섭리인가.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인간의 오만조차 신의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고뇌하며 살지만 뜻한 대로 가지지 않은 삶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다.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소리 지르고 활개 친, 나를 포함한 수많은 오이디푸스에게 이렇게 생명이 다시 꿈틀 거리는 봄날은 너무 가혹한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커피 전시회에 갔다한 쪽 모퉁이 부스에서 그리스 와인을 판매하는 곳을 들렀다. 마트나 근처 와인숍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그리스 와인이라 땀을 뻘뻘 흘리며 와인을 설명하는 그리스 아저씨의 모습이 정겹기도 했다.     


와인의 신으로 불리는 디오니소스는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테바이와 연관이 깊다. 페니키아 사람 카드모스가 동생을 찾으러 떠났다가 신탁을 받고 암소를 따라가 암소가 눕는 곳에 세운 소기가 테바이다. 카드모스가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사이 태어난 하르모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중 한 명이 세멜레이고, 그녀가 제우스와 사이에 낳은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그리스는 물이 잘 빠지는 통양으로 곡물보다는 과실 재배가 유리한 땅이다. 올리브와 포도, 무화가 등의 생산이 활발한 이유다. 이탈리아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보다 산이 많고 척박하다. 와인이 처음 시작된 곳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기술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 반드시 포도나무를 가져다 심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그리스 와인은 로마를 지나 비잔틴시대까지 최고급으로 유럽 전역에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

   


현재 그리스에는 포도품종이 약 350종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스는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가 훨씬 많이 생산되는데 전역에서 폭녋게 만날 수 있는 화이트 와인중 하나가 그리스 토착품종의 하나인 말라구지아(Malagouzia)다. 잊혀졌다가 다시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그리스의 신들처럼 말라구지아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다시 화려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는 품종이다. 


이 품종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던 품종인데, 1970년대 식물학자 바실리스 로고테티스(Vassilis Logothetis)가 중부 그리스 서쪽의 Nafpaktia에서 발견했고 이를 세상에 선보인 것은 그의 제자였던 테살로니키의 와인 메이커 에반겔로스 게로바실리우(Evangelos Gerovassiliou)라는 사람이다. 말라구시아 향에서는 농익은 복숭아, 망고, 배 등 달콤한 과일을 느낄 수 있다.     


이날 시음한 Alpha Estate Malagouzia는 말라구지아 품종 100%로 만든 와인.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 레몬 빛깔에 약간 초록빛을 띠기도 한다. 신선한 꽃향기(로즈마리)와 달콤한 과일의 맛도 느낄 수 있다. 미디엄 바디로 굳이 해산물이 아니라도 우리 음식과 잘 어울린다. 나는 배추전, 호박전에 즐겼다. 특별히 대단한 맛도 없고 심심하기 그지없지만, 늘 곁에서 두고두고 먹는 이 전들이, 사라졌다 다시 발견되어 돌아온 그리스 포도 말라구지아가의 은은한 향이 잘 어울린다. 마치 별 볼일 없지만 살아있어서 담백한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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