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뿐인숲 Aug 22. 2020

옹이, 상처를 바라보는 두 마음

     


공방에서 만들어온 탁자 상판에는 유난히 옹이가 많다. 집성으로 만들어진 한 판재에 옹이가 여러 개 들어 있는 걸 봐서는 줄기 밑동에서 멀리 떨어진 부분이거나 굵은 가지로 만든 판재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목재에 옹이가 붙어 있는 것을 유절, 옹이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무절이라 부른다. 무늬가 고르게 진행되어야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할 것이니 당연히 유절보다 무절이 가격이 비싸다.      


나무는 성장을 위해 뿌리에서 양분과 수분을 끌어올리는 것에 더해 잎을 펼쳐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 나무에 가지가 생겨나는 이유다. 가지마다 독자적으로 잎이 광합성을 통해 생성한 양분을 내려 보낸다. 옹이는 나무가 성장하기 위해 가지를 뻗은 흔적이다. 가지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듯 옹이 없는 나무도 없다. 가지에도 줄기와 마찬가지로 양분의 통로나 형성층 등이 줄기와 연결되어 있다. 살아 있으므로 나무가 자라면서 살아있는 가지가 출발한 지점은 매년 줄기의 목부 내로 밀려들어가며 옹이가 된다. 즉, 나무줄기에서 시작된 가지의 그루터기나 자라난 부분을 말한다. 나무를 벌목해 제재하고 나면 그 방법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옹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살아있는 가지에서 생성된 옹이를 ‘산옹이(live knot, intergrown knot)’이라고 한다. 모든 가지가 자라면서 삶을 이어갈 수는 없다. 나무가 수직으로 성장하며 새로운 가지를 만들게 되면  아래쪽에 있는 가지는 빛을 잘 받지 못하게 되거나 병충해 등으로 상처 받아 고사된다. 그렇게 가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나무는 스스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약품을 흘려보내 균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한다. 그리고 그 상처, 가지의 흔적은 더 자라지 못하므로 줄기와의 연속성도 끊기고 목부 내에 묻힌다. 이렇게 된 옹이를 죽은옹이(dead knot, encased knot)라고 한다. 질 좋은 목재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가지치기 방법을 통해 옹이의 생성을 억제하는 방법도 동원한다고 한다.      


나무가 가진 옹이의 수나 크기, 그리고 종류는 나무가 살아가기 위해 벌인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표다.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몇 살에 그랬는지, 어떤 위기를 맞았는지, 얼마나 버티고 살았는지 등. 나무가 뿌리를 내린 토양과 위치 환경에 따라 가지의 모양이나 수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옹이는 나무가 살아있던 날들의 모든 조건을 내비치는 것이기도 한다.      


옹이가 꺼려지는 것은 단순히 만들어진 물건을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미관이 훌륭하지 못한 것에만 있지는 않다. 목재를 만지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있다. 목수의 입장에서 건조할 때나 공구로 다듬을 때, 칠을 하거나 이어 붙일 때 옹이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한다. 옹이가 생긴 부분은 줄기 속 물관과 섬유질 등 여러 기관의 경로 변경을 초래하게 된다. 이로 인해 순결로 이어지던 곳을 엇결로 만들기도 하고 너무 단단해져 공구에 무리한 힘을 가하다 나무에 상처를 내게 하기도 한다. 톱질도 어렵고 못을 박는 것도 힘들어 옹이가 있는 자리를 피해서 못을 박아야 한다.      


상처는 눈에 보이는 흉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만족하면 살 수는 없다. 잘 견뎌내며 마음이 단단해진 사람이라고 풍요롭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살지는 않는다. 그것이 꼭 행복도 아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아도 속이 단단한 사람에게서 오히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옹이가 없었다면 나무의 성장 또한 없었듯, 내게 닥친 난관을 헤쳐나간 흔적은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다.   

   

힘을 크게 받지 않는 가구라면 옹이가 있어도 제 기능을 발휘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어느 정도 옹이가 들어있는 목재가 자연스럽다면 유절을 선호하는 목수도 있다. 옹이가 있는 부분으로 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내기도 한다.      


새로 만든 탁자에서 밥도 먹고 책도 읽고, 엎드려 낮잠도 잔다. 여름 햇빛을 받아 옹이 자리의 색은 더 짙어졌지만 이젠 그냥 원래부터 있던 무늬처럼 느껴진다. 상처가 흉터로만 머무르지 않고 단단해진 피부로 자리 잡는 것, 참 보기 좋은 풍경이다. 몸에든 마음에든.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의 시대, 동네 카페의 내일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