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인들의 삶에서 엿보는 행복 조건
덴마크와는 좀 특별한 인연이 있다. 2009년, 대학시절 학교에서 교환학생들과 1:1로 짝을 맺어줘 교환학생들의 한국 생활을 돕도록 하는 '버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영어공부도 할 겸 새로운 문화도 배울 겸 겸사겸사 신청을 했었다. 특이하게도 내 버디는 이름도 낯선 덴마크에서 온 학생이 되었다. 중국, 일본 아시아권부터 미국,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매 학기 몇백 명 정도가 교환학생으로 오는데 우리 학교엔 당시 유일한 덴마크 학생인 '크리스틴(Kristine)'이 내 버디가 된 것이었다.
크리스틴이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한국생활에 필요한 부분들이나 미리 준비해올 것들을 알려주고, 귀국하는 날엔 공항을 픽업하는 것으로 우리의 버디 관계는 시작되었다. 첨엔 의무적인 버디 프로그램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매일 같이 한강을 조깅하기도 하고, 주말에는 서울이나 근처 여행을 함께하고, 추석에는 부모님이 계신 집에도 함께 가서 시간을 보내며 꽤 돈독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크리스틴과 친구가 되면서 크리스틴과 친한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다른 북유럽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 그렇게 보낸 2009년 대학생활은 여기가 한국인지 북유럽인지 헷갈릴 정도로 매일같이 북유럽 친구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었지만 북유럽 친구들은 어딘가 모르게 늘 여유 있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친했던 친구들이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 다음 학기엔 내가 교환학생으로 독일로 가게 되었고 친했던 북유럽 친구들과 덴마크에서 함께 열흘간 재회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코펜하겐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에 있는 크리스틴 집에서 머물며 바이킹의 무덤이나 레고랜드, 티볼리 같은 관광지도 가보고 보트를 운전할 수 있는 크리스틴 남자 친구의 보트를 타고 바다를 달려보기도 하고 바닷가 근처에서 캠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가진 거라곤 시간밖에 없었던 대학생의 여름방학이어서인지 덴마크 여행은 유난히 더 여유롭게 느껴졌었는데 특히나 크리스틴의 집에서 한가롭게 보내는 시간들은 유난히 더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하는 일이 없으니 시간도 자유롭고, 갖고 싶거나 가져야 할 것들이 없으니 마음도 풍요롭고, 하물며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없으니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보냈던 날들이라 직감적으로 어쩜 이런 날들은 생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해가 지나고부터 부모님의 사업실패부터 암울했던 졸업과 취업준비, 사회 초년생으로 보낸 여러 좌절과 상처의 시간들이 찾아왔고 이제와 돌아보니 덴마크에서의 시간들은 태풍이 오기 전 유난히 맑은 날처럼 쓰라린 시간들을 견딜 수 있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나를 감싸는 어떤 견고한 막 같은 걸 만들어준 시간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딱히 별다른 계획이 없는 날은 크리스틴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작은 숲으로 둘러 쌓인 크리스틴 집(정확히는 부모님 집)의 뒤뜰에는 수시로 사슴 같은 아이들이 나타나 발코니 유리 넘어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사라지곤 했다. 사슴과 자주 눈을 마주치다 보니 크리스틴이 키우는 애완동물처럼 가까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동네 슈퍼에서 간단하게 장을 보고 나서 노란 조명 아래 소박하게 차린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몇 시간씩 함께 식사를 하고, 또 각자 흩어져 소파나 흔들의자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도 했다.
여름이라도 날씨가 꽤 선선했던지라 햇빛이 따스해지면 크리스틴네 할머니가 준비해주신 야외 티테이블에 둘러앉아서 따뜻한 티에 할머니가 만드신 케이크를 먹으며 소박하지만 또 다른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었다.
집에서 조금 무료하단 느낌이 들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크리스틴 가족이 키우는 말을 타고 잔디밭을 뛰어보기도 하고 매순간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또 자연스러웠다.
친구들과 함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하루하루 소박한 일상을 보낸 덴마크에서의 시간들은 나에게 또 다른 행복의 방법들을 제시했으며 다시 내 자리와 내 시간으로 돌아와서도 그 템포를 잃지 않고 습관처럼 체득하려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다 최근에 덴마크 행복연구소 CEO인 마이크 비킹(Meik Wiking)이 쓴 'Hygge Life(휘게 라이프)'라는 책을 읽고 그때 내가 경험했던 것들이 'Hygge(휘게)'였구나 하는걸 알게 되었다.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명사인 휘게라는 단어를 정확히 한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힘들지만 저자가 휘게를 영어로 번역하자면 'cosiness'라고 하는 걸 보니 편안함, 따뜻함, 아늑함, 안락함 같은 단어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좀 더 나아가서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또는 혼자서 보내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시간,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뜻하는 단어인데 덴마크어에서 흔히 쓰인다는 휘게의 변형 단어들을 보면 그 의미들이 한층 더 와 닿는다.
Fredagshygge(프레다스휘게)/Søndagshygge(쇤다스휘게): 금요일 휘게, 일요일 휘게로 바쁜 한주를 보낸 후 가족들과 함께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TV를 보는 것, 따스한 담요에 둘러싸여 차 한잔과 함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일, 혹은 산책을 즐기며 느릿느릿 하루를 보내는 것.
Hyggebukser (휘게부크세르): 밖에서는 절대 입지 않을, 그러나 너무 편안해서 은밀히 좋아하는 바지
Hyggeehjørnet (휘게예네트): 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글자 그대로 뜻은 휘게의 모퉁이며 "나 지금 휘게예네트해" 정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Hyggekrog (휘게크로그): 휘겔리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주방이나 거실의 아늑한 구석자리. "휘게크로그에 앉자"
Hyggeonkel (휘게온켈): 휘게삼촌, 아이들과 놀아줄 때 매우 너그러운 사람. "그는 정말 휘게온켈이야"
Hyggesnak (휘게스나크): 민감한 사안은 건드리지 않는 잡담 또는 친밀한 대화. "우리는 몇 시간 동안 휘게스나케데 했다"
Hyggestund (휘게스툰): 휘게의 시간 "그는 휘게스툰을 위해 커피 한잔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Julehygge (윌레 휘게): 크리스마스에서 오는 행복
덴마크에서 크리스틴과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 내가 느꼈었던 행복감, 편안함, 따뜻함들이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지만 아마 그때 함께 시간을 보냈던 크리스틴은 휘겔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생각했지 않았을까? 언어는 종종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꿈꾸는지를 결정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처럼 휘게라는 단어를 알고 나니 휘게를 좀 더 명확히 느끼고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책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휘게 라이프'는 두리뭉실하고 철학적인 행복에 대한 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간단하게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실용적인 방법들을 소개한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휘게 10 계명
1. 분위기: 조명을 조금 어둡게 한다.
2.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실하라. 휴대전화를 끈다.
3. 달콤한 음식: 커피, 초콜릿, 쿠키, 케이크, 사탕. 더 주세요!
4. 평등: ‘나’ 보다는 ‘우리’. 뭔가를 함께하거나 TV를 함께 시청한다.
5. 감사: 만끽하라.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인지도 모른다.
6. 조화: 당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뽐낼 필요가 없다.
7. 편안함: 휴식을 취한다. 긴장을 풀고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8. 휴전: 감정 소모는 그만. 정치에 관해서라면 나중에 얘기한다.
9. 화목: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관계를 다져보자.
10. 보금자리: 이곳은 당신의 세계다. 평화롭고 안전한 장소다.
지금 당장 휘게 하고 싶다면 양초, 양질의 초콜릿, 좋아하는 차,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잼, 좋은 모직 양말 한 켤레, 좋아하는 편지 모음, 따뜻한 스웨터, 공책, 좋은 담요, 종이와 펜, 음악, 사진첩
집을 휘겔리하게 하고 싶다면 벽난로, 양초, 나무로 만들어진 것, 자연, 책, 도자기, 촉감, 빈티지, 담요와 쿠션 그리고 책한 권과 차 한잔을 들고 담요 속으로 파고들어 있기 좋은 공간인 휘게크로그.
물론 하나하나에 다 이유가 있다. 예를들의 편지 모음의 경우 "입에서 내뱉는 말은 발설하는 순간 흩어지지만 글은 몇 세기 전의 말이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의 말도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오래된 편지를 읽으면서 다시 그 시절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은 정말 휘겔리한 일이다." 라며 추천을 해준다.
덴마크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이유로 손꼽히는 데에는 분명 높은 복지 수준이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 자체가 어려운 행복이 아닌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고 소소한 행복들이라는 것이다.
좋은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에너지.
간소한 물건과 느리고 단순한 삶.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는 것.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 그리고 함께 하는 것.
행복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커다란 행운이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작은 친절이나 기쁨 속에 있다 - 벤자민 프랭클린
휘게 라이프를 다 읽고 책 표지를 찍어 크리스틴에게 요즘 한국에서 스칸디나비안 스타일과 라이프스타일이 유행이라며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Hi Sister라며 온 답장엔 반갑게도 그때 함께 보낸 휘겔리했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