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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ntimental Vagabond Jan 25. 2017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다시읽기

사피엔스


약 135억 년 전 빅뱅으로 물리학과 화학이 생겨나고 약 38억 년 전 자연선택의 지배 아래 생명체가 생겨나 생물학이 생기고,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종이 발전하여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개척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이 거대한 수만 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약 7만 년 전의 인지혁명

약 12,000년 전의 농업혁명

약 500년 전 부터 여전히 발전 중인 과학혁명


세 가지 대혁명을 통해 현재 인간들의 형태와 '문화'가 만들어 지게 되었다.


3가지 혁명과 함께 '불, 뒷담화, 농업, 신화, 돈, 모순, 과학'이라는 역사 발전 과정의 결정적인 촉매제들이 등장 한다.


인지혁명의 시작으로 인간은 불을 지배하면서 여러 종의 동물들에서 최정점에 올라섰고, 언어를 받침으로 한 뒷담화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수렵채집인으로 오랜 세월 살아오던 사피엔스들은 농업혁명을 통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고, 이렇게 늘어난 인구는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신화들 즉, 종교, 계급, 권력과 같은 것들이다.


농업혁명을 통해 부의 증가와 축적이 이루어지면서 사피엔스들은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교역략의 증대를 효과적으로 하는 '돈'이라는 개념이 만들어 지면서 사람들은 돈을 맹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돈의 맹신은 불평등, 인간소외 등 사회적 모순을 만들었다.


500년 전에 일어난 과학혁명은 사피엔스들에게 그 어느 시대보다도 짧은 시간에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었다. 과학이라는 무기로 인간들은 수 많은 동물들을 멸종으로 만들었으며, 사피엔스가 아닌 모든 생물들은 인간의 목적에 의해 강제로 개체수를 늘리고, 사육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됐다. 비단 동물 뿐만이 아니다. 먼저 과학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게 된 유럽인들은 돈의 노예가 되어 신대륙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같은 사피엔스 내에 인종차별을 만들고 같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학살을 자행하면서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에 이른다.


과학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을 신의 영역에 도전하게 했다. 신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생명의 영역에도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 오랜 역사들을 설명하며 던진 질문은 역사에 일어난 사건들의 옳고 그름이 아닌 바로 '행복'이다. '진보'라 일컫는 역사의 과정들을 통해 인류의 삶은 더 행복해졌는가? 아이러니 하게도 진보된 과학기술로 타인에 의한 혹은 환경에 의한 사망률은 지극히 감소 했으나 사피엔스는 스스로 막다른길에 내몰려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아 지게 되었다.


저자의 말처럼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이야기는 대부분 강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인간의 행복의 역사를 들여다 봐야 한다.



다시 새기고 싶은 사피엔스의 밑줄 문장들.


인지혁명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호주 원주민의 드림타임 신화,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에서 유한회사를 일컫는 기술적 용어는 corporation인데, 이는 아이러니다. 그 어원인 라티언 corpus는 몸이라는 뜻인데 법인에 딱 하나 없는 것이 바로 몸이기 때문이다. 실제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법은 이들 기업을 마치 뼈와 살을 가진 인간처럼 법인으로 취급한다.


사피엔스의 평균 뇌 용적은 수렵채집 시대 이래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증거가 일부 존재한다. 그 시대에 생존하려면 누구나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녀야 했다. 하지만 농업과 산업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할 수 있게 되었고, 바보들을 위한 생태적 지위가 새롭게 생겨났다. 별볼일 없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으며, 물품을 배달하거나 조립라인에서 단순노동을 하면서 그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동 상대적으로 짧으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대인의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리면 실수일 수도 있다. 이들이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 대다수보다 더 나은 삶은 거칠고 힘든 것이었다. 고난과 결핍의 시기가 종종 닥쳤고, 어린이 사망률이 높았으며, 오늘날 같으면 사소했을 사고가 쉽게 사망선고로 이어질 수 도 있었다.


농업혁명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 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우리가 밀이나 옥수수 같은 식물의 이야기를 조사할 떄는 순수한 진화적 관점이 타당할 지 모른다. 하지만 소나 양, 사피엔스처럼 각자 복잡한 기분과 감정을 지닌 동물의 경우, 진화적 성공이란 것이 개체의 경험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집트의 파라오 제국이나 중국의 진 제국에서 운영했던 대량 협력망에 대해 장밋빛 환상을 품어서는 안된다. 협력이란 말은 매우 이타적으로 들리지만 항상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평등주의적인 경우는 드물었다. 인간의 협력망은 대부분 압제와 착취에 적합하도록 맞춰져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진화한 특질은 무엇인가? 생명? 당연하다. 하지만 자유? 생물학에 그런 것은 없다. 평등이나 권리, 유한회사와 마찬가지로 자유란 사람들이 발명한 무엇이고,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민주사회에 사는 인간은 자유롭지만 독재하에서 사는 인간은 부자유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행복은 또 어떤가? 생물학 연구에서는 지금껏 행복을 명확히 정의하거나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생물학 연구는 쾌락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인정한다. 쾌락은 좀 더 쉽게 정의하고 측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미국 독립선언문의 해당 구절을 생물학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게 진화했으며, 이들은 변이가 가능한 모종의 특질을 지니고 태어났고, 여기에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가 포함된다."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신봉하지 않는 냉소주의자는 탐욕스러울 가능성이 적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 시켜야 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상상의 질서가 정확히 어떻게 삶이라는 직물속에 짜 넣어졌는지를 설명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향해 스스로를 활짝 열어야 하고, 다양한 관계들을 두루 맛보아야 하며, 평소와 다른 요리를 시식해봐야 하고, 다른 종류의 음악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이다. 이 모두를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복되는 일상과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냄새와 취향과 규범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이 어떻게 나의 시야를 넓히고 내 인생을 바꾸었는가”하는 낭만주의적 신화를 되풀이해서 듣는다.


다양성을 권하는 낭만주의는 소비지상주의와 꼭 들어맞는다. 양자의 결합은 현대 현대 여행산업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무한한 ‘경험의 시장’을 탄생 시켰다.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설령 내가 초인적인 노력으로 스스로의 개인적 욕망을 상상의 질서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하는데 성공하더라도, 나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 상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수백만 명의 낯선 사람에게 나와 협력하도록 설득해야한다. 상상의 질서는 내 상상력 속에만 존재하는 주관적 질서가 아니라 수억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속에 존재하는 상호 주관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상호주관이란 많은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연결하는 의사소통망 내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현존하는 가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면 그 대안이 되는 가상의 질서를 먼저 믿어야 하는 것이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기원전 3500-3000년 어느 시기에,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초기 단계의 쓰기는 사실과 숫자에 한정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문서에 담긴 것이 철학적 통찰도, 시도, 전설도, 심지어 왕의 승리도 아니었다니, 세금 지불액과 쌓이는 빚의 액수와 재산의 소유권을 기록한 평이한 경제 문서였다니.


불완전한 문자체계는 인간 행동의 제한된 영역에 속하는 특정 유형의 정보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체계를 말한다.


최초의 이름이 예언자나 시인. 위대한 정복자가 아니라 회계사의 것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나 기구, 회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사람은 숫자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전문가들은 심지어 빈곤, 행복, 정직 같은 개념도 숫자로 번역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물리학이나 공학의 경우 해당 지식 분야 전체가 인간의 말과의 접촉을 거의 잃어버리고 오로지 수학적 문자 체계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다.


인류는 어떨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문화는 자신이 오로지 부자연스러운 것만 금지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로 부자연스러운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수고롭게시리 남자에게 광합성을 금지하거나, 여자에게 빛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거나, 음전하를 띤 전자가 서로에게 끌리지 못하도록 금지한 문화는 하나도 없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자연스러움’이란 기독교 신학에서 온 것이다. 자연스러움이란 말의 신학적 의미는 자연을 창조한 신의 뜻에 맞는다는 뜻이다.


생물학이 아니라 신화가 남녀의 역할, 권리, 의무를 규정하기 때문에, 남성성과 여성성의 의미는 사회에 따라 크게 달랐다. 혼동을 줄이기 위해 생물학적 범주인 성과 문화적 범주인 젠더를 구분한다.


인류의 통합

수백만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모순이 없는 물리 법칙과 다릴,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프랑스 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중세 문화가 기사도와 기독교를 어떻게든 조화시키는데 실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는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 모순은 모든 인간 문화에서 떼려아 뗄 수 없는 것이다.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묵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 내린 것이다.


애니미즘은 인간을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한편 다신교는 세상이 신들과 인간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시각을 점점 더 키워가기 시작했다.


다신교는 신들의 지위뿐 아니라 인간의 지위도 격상시켰다. 옛 애니미즘 체계에 속하던 다른 불안한 존재들은 지위를 잃고,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위대한 드라마에서 엑스트라나 말없는 장식물로 전락했다.


불교 -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게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 마음은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고통 같은 불쾌한 경험을 할 때 매우 분명해 진다.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이 같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신념들을 신 중심의 종교와 자연법칙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신 없는 이데올로기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일관성이 있으려면 적어도 불교, 도교, 스토아철학의 일부 분파는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목록에 올려야 한다. 그리고 거꾸로 많은 근대 이데올로기 속에 신에 대한 믿음이 계속 존재하며 그중 일부, 대표적으로 자유주의는 그런 믿음이 없다면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떄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계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과학혁명

1500년 지구 전체에 살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의 수는 5억명이었다. 오늘날에는 70억명이 산다. 1500년 인류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총 가치는 오늘날의 화폐로 치면 약 2500억 달러였다. 오늘날 인류의 연간 총샌산량은 60조 달러에 가깝다. 인구는 열네 배로 늘었는데 생산은 240배, 에너지 소비는 115배 늘었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인종주의가 차지하던 자리는 이제 ‘문화주의’가 치자했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문화주의란 말은 없지만 이제 만들어낼 떄가 되었다. 오늘날 엘리트들은 다양한 인간집단이 서로 대조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떄 이것을 문화간의 역사적 차이라고 말하지, 인종 간의 생물학적 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이 타고난 속성이야”라고 더이상 말하지 않고, “그건 그들의 문화 탓이야”라고 말한다.


과학혁명과 진보라는 개념이 도래했다. 진보는 우리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연구에 자원을 투자한다면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 아이디어는 곧 경제용어로 번역되었다. 진보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리적 발견, 기술적 발명, 조직의 발전이 인간의 생산, 무역, 부의 총량을 늘릴 수 있다고 믿는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빼문에 다시 시도해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잇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열차를 움직인 것은 이전에 물을 뿜어내고 직조기를 움직였던 증기력이었다. 이후 불과 20년만에 영국에는 수만 킬로미터의 철로가 놓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기계와 엔진이 한 유형의 에너지를 다른 유형의 에너지로 바꾸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사로잡혔다.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어떤 형태의 에너지는 우리가 알맞은 기계를 발명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일에든 사용할 수 있었다. 가령 물리학자들이 원자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꺠달았을 떄, 이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이 에너지를 끌어내어 전기를 생산하고, 잠수함의 동력을 제공하고, 도시를 멸절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을지를. 중국 연금술사들이 화약을 발견한 순간부터 터키의 대포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무너뜨린 시점 사이에 6백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모든 종류의 질량은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지 불과 40년만에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고 핵발전소는 전세계에 우후죽순 솟아났다.


또 다른 중요 발명품은 내연기관이었다. 내연기관은 불과 한 세대 남짓에 인간의 운송수단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석유를 액체 정치권력으로 바꿔놓았다.


전기의 행적은 이보다 더욱 놀랄 만하다. 2세기 전에 전력은 경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신비로운 과학실험이나 값싼 마술 기교에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발명이 이어지자 전력은 도처에 존재하는 램프속의 거인이 되었다.


산업혁명의 핵심은 에너지 전환희 혁명이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산업혁명은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일한 한계는 우리의 무지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불과 몇 십년마다 새로운 에너지원이 발견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계속 늘었다.


인간의 모든 활동과 산업에서 매년 소비하는 양은 5백 엑사줄 가량으로, 지구가 태양으로 부터 90분간 받는 양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은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와 값싸고 풍부한 원자재라는 전대미문의 조합을 내놓았다. 그 결과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성장은 농업에서 가장 먼저 크게 느껴졌다.


심지어 동식물까지 기계화되었다. 호모사피엔스가 인간중심 종교에 의해 신성한 지위로 격상될 무렵, 농장 동물들은 더이상 고통과 비참함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간주되지 않았고 기계 취급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동물은 공장 비슷한 시설에서 대량 생산되며, 몸체의 형태도 산업 수요에 맞게 형성된다.


오늘날 미국에서 농업으로 먹고사는 인구는 2퍼센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2퍼센트가 미국 인구 전체를 먹이고 남은 것은 수출할만큼 생산하고 있다. 농업의 산업화가 없었더라면 도시의 산업 혁명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 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군가 제품을 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할 것이다. 이런 파국을 막으면서 업계에서 생산하는 신제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소비지상주의는 대중심리학(just do it!)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에게 탐닉은 당신에게 좋은 것이며 검약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려 무진장 애썼다.


전통 농업사회는 굶주림이라는 무시무시한 그늘 속에서 살았다. 오늘날의 풍요사회에서 건강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만인데, 그 폐해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들보다 훨씬더 심각하게 입는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준수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윤리가 천국을 약속하는 대신 내놓은 조건은 부자는 계속 탐욕스러움을 유지한 채 더 많은 돈을 버는데 시간을 소비할 것, 그리고 대중은 갈망과 열정의 고삐를 풀어놓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구매 할 것이다.


생태적 혼란은 호모 사피엔스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광범위한 오염은 지구를 우리 종이 살기에 부적합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고, 그 결과 미래에 인류의 힘과 인류가 유발한 자연재해는 쫓고 쫓기는 경쟁의 나선을 그리며 커질지도 모른다.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자연의 힘에 대항하고 생태계를 자신의 필요와 변덕에 종속시킨다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위험한 부작용을 점점 더 많이 초래할지 모른다. 이를 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태계를 더더욱 극적으로 조작하는 것인데, 이것은 더더욱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중세 농부나 구두공과 달리 현대 산업은 태양이나 계절을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대신 정밀성과 획일성을 신성시한다.


마침내 1880년 영국 정부는 영국의 모든 시간표는 그리니치를 따라야 한다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 나라가 국가 시간을 채택하고 국민들에게 현지 시각이나 해가 뜨고 지는 주기 대신에 시계에 맞춰 살기를 강요한 것이다. 이처럼 대수롭지 않았던 시작은 결국 몇십 분의 일 초까지 똑같이 맞추는 세계적 시간표 네트워크를 낳았다.


산업혁명은 인류사회에 수십 가지의 커다란 격변을 불러왔다. 산업적 시간에 적응하는 것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또다른 두드러진 예로는 도시화, 농민의 소멸,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등장, 보통 사람에게 주어진 힘, 민주화, 청년문화, 가부장제의 해체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격변들조차 역사를 통틀어 인류에게 닥친 가장 중요한 사회혁명에 대면 시시했다. 그것은 바로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리를 대신한 사건이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지만, 불과 2세기 만에 우리는 소외된 개인이 되었다. 문화의 무시무시한 힘을 이보다 더 잘 증언하는 사례는 없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개인이 각자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데 전례없이 큰 힘을 누리게 되면서, 우리는 남에게 헌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되고 다들 점점 더 외로워지는 세상에 살고있다.


예언자, 시인, 철학자 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의 연구조사 결과에서도 수많은 숫자와 도표의 뒷받침을 받아 옛 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진화는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런 느낌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조만간 이 느낌은 가라앉고, 불쾌한 느낌에게 자리를 내준다.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지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하며, 삶의 만족도도 크다. 그런 사람들은 배우자로서 더욱 매력적이며, 결과적으로 결혼할 가능성이 더 많고, 이혼할 가능성은 더 적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곧 역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는 의미가 된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의 생화학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세로토닌 분비를 유발하는 외부자극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세로토닌 수준을 바꾸지는 않는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 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박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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