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은 여행

여행 같은 일상을 살 수 있는 곳

4년간의 이태원 경리단 라이프를 정리하며

by Sentimental Vagabond

2014년 12월 새로운 직업의 인터뷰가 있던 날. 그 인터뷰에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살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3가지 사건을 말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의 대답은 나를 바꾼 세 개의 도시였다. 런던. 베를린. 그리고 이태원 경리단. 2011년 9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내 이십 대를 바꾼 이태원 경리단 4년의 생활을 정리하며 여행 같은 일상을 살 수 있었던 그곳의 이야기를 남겨본다.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는 한복을 입은 금발 소녀, 캐나다 국기가 달린 스쿠터를 타고 피자를 배달하는 캐나다 아저씨가 보이고,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선 자주 마주치는 흑인 꼬마가 또렷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라며 내게 배꼽인사를 한다. 매일매일 이렇게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과 마주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사는 곳은 뉴욕도 런던도 아닌 바로 서울이다. 서울, 그중에서도 이태원 말이다.


이태원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이 근처에 ‘배(梨) 밭’이 많다고 해서 나왔단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여인들을 범하면서 태어난 아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 이태원 일대고, 그래서 '이태원(異胎院)'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이타인(異他人)'. 또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부녀자, 이른바 '환향녀(還鄕女)'들이 정착한 곳도 이태원이란 말도 있다. 다양한 문화가 섞인 이태원의 역사는 이미 조선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일제시대 때는 일본군 사령부가, 해방 후 용산기지에 미 8군이 주둔하면서 이태원은 외국 문화가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태원 경리단으로 이사를 가게 된 건 2011년 여름이었다. 강남 근처에서 친구와 함께 살다 친구가 사정이 생겨 급하게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나도 새로운 집을 찾아야만 했다. 대학교도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 논 상태여서 굳이 학교 근처에 살 필요도 없어졌고, 뭔가 새로운 곳에 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20대 동안(현재 29살, 여전히 20대이긴 하지만) 런던, 베를린, 서울에서 이사만 20번을 넘게 해본 나는 집을 찾을 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첫 번째 '자연'이다. 유년시절을 꽤 시골에서 보냈던 나는 자연과 아주 친한 사람이었는데, 부모님이 도심으로 이사를 하시게 되면서 더 이상 자연으로 돌아가 쉴 곳을 잃은 나는 '초록과 파랑'이 늘 그리웠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 속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기에. 서울 도심 안에서 자연과 가까이 살 수 있는 주거 지역은 많지 않은데 그중 한강 근처는 집값이 너무 비싸 월세도 전세도 감당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눈을 돌린 곳이 바로 남산 근처였다.


두 번째 나의 조건은 '여행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곳이다. 나 스스로를 'sentimental vagabond(감성 방랑자)'라 부를 만큼 여행과 방랑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시간과 금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늘 여행을 하며 살 수는 없는 지라 일상 속에서 여행을 하는 마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곳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이태원 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한국이라는 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 그곳이라면 일상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살아 갈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조건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이다. 서울의 터무니없는 집값을 감당하기란 쉽지가 않다. 전세는 물론이거니와 월세 보증금을 마련하는 것도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담그는 청춘들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이태원의 해방촌이나 경리단길 쪽은 내가 이사를 했던 2011년 까지만 해도 집 값이 그렇게 비싸진 않았다. 물론 지금은 가로수길을 뛰어넘는 새로운 상권으로 자리 잡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을 찾다 보니 이태원 해방촌과 경리단길 근처의 집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Flat Share, 독일에서는 WG(Wohn Gemeinschaft)라 부르는 주거 형식이 있는데 방이 여러 개 있는 집을 몇몇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형식이다. 특히나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학생들이나, 오래 머물지 않는 외국인들이 모여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에어비앤비나 공동거주공간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2011년에는 그런 것들이 흔치 않았다.

나 역시 이미 런던과 베를린에서 이런 공동거주의 경험이 있고, 특히나 베를린에서는 함께 살던 Mitbewhoner(룸메이트)들과 가족처럼 가까이 지낸 좋은 기억이 있어 한국에서도 이런 공동주거를 하는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Craigslist(http://seoul.craigslist.co.kr/) 라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의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런 공동거주 집의 룸메이트를 찾는다는 공고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와 조건이 맞을 법한 집들과 몇 군데 컨택을 하고 인터뷰를 본 끝에 경리단의 외국인 셰어하우스에 네 번째 룸메이트가 되었다.

집 찾는데 웬 인터뷰나 싶지만 공동거주를 하기 앞서 서로 성격이나 생활패턴에 대해 파악하고, 같이 살아도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뷰는 필수이다. 여담이지만 베를린에서 집을 구할 때 인터뷰를 한 시간이나 보기도 했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서툰 독일어로 "Ich liebe Bier(난 맥주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얘기를 듣고 바로 나를 룸메이트로 정했다고 한다.


경리단에서 남산으로 향하는 중턱쯤에 자리한 내 새 보금자리와 함께, 지난 4년간의 이태원 생활은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우선 정말 다양한 '동네 친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태원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내 또래 젊은 친구들은 자윤분방하고 개성이 뚜렷한 친구들이 참 많다.


인종도, 나이도, 성적 취향도, 하는 일도, 성격도, 좋아하는 것도 너무나 다른 친구들. 그러나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지만 모든 것에 열려 있고 자신이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아는 사람들이다. 물론 각자 내면에는 나름의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적어도 순간순간의 행복을 즐길 줄 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며 나에게 생긴 또 다른 큰 변화는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법을 배운 것이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문화를 셰어 하다 보니 4년간 정말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유타에서 온 몰몬교 룸메이트를 만나 6개월간 매주 말 몇십 명의 몰몬교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기도 했고, 정말 많은 게이 친구들을 만나 이태원에 웬만한 게이클럽들을 다녀보기도 했고, 아일랜드 친구들을 따라 세인트 패트릭 데이를, 미국 친구들과 독립기념일&핼러윈 파티를. 다른 게 너무 익숙한 일상을 살다 보니 나와 다른 모습의 혹은 생각의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거나 편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이태원은 아마 서울, 아니 한국에서 구성원이 가장 다양한 곳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서 그럴까. 사람들이 가장 자유로워질 수 있는 서울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기도 하다. 그 어떤 모습을 한 사람도 손가락질받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본연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그런 '다양함'을 입는 것이 아닐까 싶다.




4년간의 생활을 정리하며 새로운 곳으로 내 터전을 옮기게 되었지만 나에게 여행 같은 삶을 선사해 주었던 나의 동네와 커뮤니티는 그렇게 나를 찾게 해 준 곳 이 었다. 여행같은 일상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그런 곳들을 찾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하다.



경리단 옥상에서의 몇몇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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