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발리에 가고 싶었다
은현이 빨리, 발리에 가고 싶었던 이야기
‘설민석의 삼국지 2’ 책을 보러 빨리 발리에 가고 싶었다. 좋은 습관 만들기의 일환으로 매일 하루에 10분씩 책 읽기를 실천 중인데 우연히 집어 든 설민석의 삼국지 1에 매료되어 무리 없이 습관 만들기를 이어가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빨리 설민석의 삼국지를 읽고 싶지만 나에게는 아직 4개월밖에 되지 않은 발랄한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대형견이라 일반 애완견에 비해서 성장 속도가 매우 빨라 한층 똥꼬 발랄함을 보여주고 있어 집에 가서 가만히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 책을 좀 읽는가 싶으면 계속 장난감을 물고 오거나, 최근에 침대 올라가기를 마스터해서 불쑥불쑥 올라와 책과 팔을 물어대곤 한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이지만 이럴 땐 좀 방문을 닫고 싶다. 그래서 더 발리를 가고 싶었다. 조용히 차분하게 설민석의 삼국지 2를 읽기 위해.
물론 처음 발리로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은 건 삼국지가 아닌 은희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한 때, 여행이 청춘의 필수 소양이자 덕목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에는 곧잘 좋아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여행이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것이었다. 하지만 드문 드문 여행을 가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가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 같이 가는 사람만 좋다면.
그래서 은희와 여행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회사에서 알게 된 사이 기는 하지만 오랜 친구처럼 나의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은희는 도시 속 큰 빌딩을 보고 감탄을 하기보다는 ‘와, 진짜 흉물스럽다’ 라며 농담할 수 있는 사이고,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흥분하기보다는 명반 LP 앨범이 흘러나오는 바에 더 설레는 친구다. 이런 은희와 함께면 어디든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은희와 좋은 추억을 쌓기 위해 빨리, 발리에 가고 싶었다.
은희가 빨리, 발리에 가고 싶었던 이야기
2019년 1월, 은현과 함께 LA로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이라곤 하지만 전 세계 직원들이 한데 모이는 워크숍 참여가 목적이기도 했고, 회사 동료이기보단 친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은현과 함께라서 그런지 여행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LA라는 도시가 주는 에너지와 그 도시의 사람들이 빚어낸 풍경과 바이브는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을 꿈틀거리게 했고, LA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마음을 꿈틀거리게 할 또 다른 곳으로 함께 여행을 하기로 다짐했다.
은현은 늘 why not? 이라며 어드벤처로 이끄는 좋은 친구이자 여행 메이트였기에 다시 한번 더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고, 서핑을 좋아하는 은현과 요가를 좋아하는 나는 서핑도 하고 요가도 할 수 있는 발리로 목적지를 정했다.
바람구두를 신은 시인 랭보를 동경하며 스스로를 Sentimental Vagabond라 불렀던 나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나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내려 그 낯선 곳이 점점 더 익숙해져 가는 과정을 좋아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태어나 처음 걸어본 낯선 길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는 과정 안에서 나의 마음이 연해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새로운 이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그 과정들을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한 여행이었다. 운이 좋게도 20대 때 약 2년간을 영국과 독일에서 지내면서 이러한 여행들을 마음껏 즐겨볼 기회들이 있었다. 적어도 그때엔 시간에서 만큼은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대부분의 여행은 출장을 간다거나 혹은 회사일에 치이고 지쳐 ‘도피'로 어딘가로 떠나곤 했었다. “아, 더는 못해 먹겠네”라며 인터넷도 안 되는 무인도 같은 곳으로 훌쩍 가버리거나, 지긋지긋한 내 일상을 탈출하여 어딘가 낯선 곳에 도착하여 그곳의 사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그들도 서울에서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퇴사 후 세계여행을 하고 돌아와 새로운 길을 찾았다’, ‘자전거로 혹은 배로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작가가 되었다’와 같이 대반전의 드라마 같은 여행담들이 난무하지만, 한정적인 시간을 쪼개고 쪼개 여행을 떠났던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여행은 신데렐라와 같았다.
무인도에서의 자유로웠던 나도, 뉴욕에서 화려한 밤을 보냈던 나도 여행이 끝나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침잠과 싸워 복잡한 출근길을 뚫고 다시 내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그런 하루하루들을 다시 반복하는 나로 말이다.
LA에서 돌아와 10개월이나 일찍 발리행 티켓을 끊으며 이번 여행은 좀 다르길 바랬다. 다시 돌아와야 함을 알고 떠나는 여행이고, 드라마틱한 대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여행은 비록 아니지만 일상에서의 도피가 아니길 바랬으며, 하루하루라는 점들이 촘촘히 이어져 삶이라는 긴 선이 만들어지듯 내 일상과 여행도 촘촘한 점들로 이질 감 없이 잘 이어지길 바랬다.
발리로 떠나기 전 10개월 전부터 찬찬히 여행을 준비했다. 낭만, 설렘, 모험과 같은 단어들을 한 단어에 함축시켜 놓은 것만 같은 단어인 ‘여행’도 시간과 비용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우선 회사에서 1년에 주어진 15일의 휴가라는 시간을 쪼개 발리 여행에 갈 수 있도록 잘 남겨두었다. 그리고 여행 후 카드 빚에 시달리며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 카카오 뱅크에 모임통장을 개설해 은현과 함께 각각 한 달에 10만 원씩을 차곡차곡 모았다.
시간과 비용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을까?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인 내가 발리에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것도 아니었고, 돌아올 자리가 있는 내가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곳에서 노매드로 있을 것도 아니었다.
드라마틱한 반전이 없을 이 여행의 끝에 내가 원하던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한 내가 되어 돌아오고 싶었다. 그런데 일주일이란 짧은 여행으로 더 건강한 내가 될 수 없기에 비행기표를 끊은 순간부터 약 10개월간 여행 이후 더 건강한 내가 되어 돌아올 수 있도록 차곡차곡 준비를 했다.
작년에 우연한 기회에 요가를 시작하게 된 이후 나는 요가와 사랑에 빠졌다. 요가를 시작한 뒤 자꾸 요가 생각이 나고 궁금하고 알고 싶어 졌다.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 채 시작된 그 짝사랑은 발리에 여행을 가기로 한 순간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고, 요가의 성지인 발리에 가기로 하니 요가를 더 알고 더 잘하고 싶어 졌다. 발리에 갈 때쯤은 요가 아사나의 왕이라고 불리는 시르사 아사나(머리 서기)는 꼭 할 수 있게 되길 바랬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요가를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요가를 매일 수련하는 것 뿐이었다. 생각을 해서도 안된다. 생각만 한다고 몸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지름길이 없다. 그냥 해야만 한다. 그래서 요가를 정말 열심히 했다.
잘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그리고 남들의 속도가 아닌 내 속도에 맞춰 요가를 해나가자고 다짐하며 요가를 한지 딱 1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지만 1년 사이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몸이 변했고, 몸이 변하니 마음도 변했다. 몸과 마음이 1년 전과 비교하여 몰라보게 유연해지고, 단단하게 근육들이 붙었다. 의도하며 다이어트를 죽어라 한건 아니었지만 8kg 가까이 몸무게도 줄었다. 몸이 견고 해지는 만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생각들도 명료해지고 있다. 꿈만 같았던 요가 동작인 시르사 아사나에도 한 발짝 더 다가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리 여행 후 더 건강해진 나의 모습을 기대하며 10개월이라는 시간의 여유를 두고 조금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가다 보니,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그 어느 때 보다 건강해져 있었다.
그렇게 건강해진 나를 데리고 은현과 함께 새로운 어드벤처를 위해 빨리, 발리에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