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00명 규모의 항공사 인사팀에 취직을 했다. 경력직 포지션이었는데, 다대다 면접에서 좋게 봐주신 것인지 정말 운이 좋게도 최종 합격을 했다.
대학원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고, 그룹 연수원에서의 7개월가량 경험도 첫 출근을 앞둔 나에게 자신감과 설렘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에게 처음 떨어진 임무는 신규입사자 입문과정과 리더급 교육 과정 기획이었다.
어찌 보면 이 부분도 운이 좋았다.
신입사원이라고 자잘한 운영만 한 것이 아니라, 기획의 A to Z에 걸쳐 내 색깔을 여과 없이 반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변혁적 리더십 (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 유행하고 있던 시기였다.
'변혁적 리더십의 하위 요인인 팀원에 대한 변화 주도, 동기부여, 역량개발에 중점을 두고 과정을 기획하면 되겠구나!'
* 구성원들의 동기 부여와 자발적인 변화를 통해 조직 전체의 성과를 향상하는 리더십 유형 (위키백과)
이론에 대한 설명부터, 이 리더십 이론이 왜 좋은지 등등 있는 척, 잘난 척을 한껏 뽐내며 기획안을 작성했다.
들뜬 마음으로 완성된 기획안을 출력해서 사수에게 보고하러 갔다.
기획안을 받아 든 사수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본다. 어딘가 모르게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찌푸려진 것 같다.
긴장된 마음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을 듣던 사수는 중간에 말을 끊고 딱 한 마디의 피드백을 줬다.
"어려운 말 쓰지 말고 알아보기 쉬운 말로 바꿔 와."
어느 회사를 가든 어떤 상사를 만나든 본질적으로 보고서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보고 받는 사람이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모든 상황에 통하진 않으나, 대부분의 상황에서 잘 쓰인 보고서는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아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 이후, 회사생활을 하면서 추가적으로 느낀 중요한 점 또 하나.
위에서 말한 보고서의 기본 조건과 함께 고려해야 할 것들은 밸런스다. (특히, 기획안)
회사의 문화, 부서 상사들의 스타일에 따라서 선호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기획자 주장의 배경과 근거가 되는 이론, 회사와 구성원 (≒고객)에 대한 맥락, 실현 가능성 등을 고려한 현실
두 가지 사이에서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밸런스를 맞추려면 이론과 현실, 두 가지 영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속한 회사와 고객에 대한 앎, 담당 직무에서의 실전 경험(많이 깨져보고 시행착오를 겪어보는 게 좋다), 그리고 지속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기획안 작성의 논리, 흐름에 대한 부분은 다른 에피소드에서 한 번 더 풀어보려고 한다.)
내가 속한 인사팀의 팀장님은 정말 멋진 분이셨다.
팀장님은 항공업계에서는 여러 직군을 거치며 성과를 낸 베테랑이었지만 인사는 처음이셨다.
인사팀장으로 발령 난 후 처음 팀원들과의 함께 한 워크숍에서 한 말씀이 인상적이셨다.
"나는 너희들보다 인사를 잘 몰라. 그렇기에 전적으로 너희를 믿을 거야.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우리 팀원들은 열심히 맡은 바 역할들 합시다."
실제로도 팀장님은 말씀을 지키셨다. 일단 팀장님 보고까지만 통과되면 그 뒤에 발생하는 조직 내에서의 여러 어려움은 전부 다 해결해 주셨다.
또 한 가지 대단하다고 느낀 점 중 하나.
팀장님은 감정 표현의 기복이 없으셨다. 기분이 안 좋아도 티를 안 내셨고, 화가 나도 쉽게 그 감정을 팀원에게 전가시키지 않으셨다.
그런 팀장님과 일을 하다 보니, 굳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절로 팀장님을 따르고 신뢰할 수밖에 없었고,
맡은 바 내 일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었다.
조직생활을 어느 정도 경험해 보고 후배들도 많아진 지금 와서 되돌아봤을 때, 그런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게 상당히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반면, 그것과 반대의 리더십도 있었다.
모 선배는 감정을 여과 없이 팀원들에게 쏟아내는데 익숙했기에 후배들은 늘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공들여 작성한 기획안은 그에게 먼저 보고해야 했고, 열심히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한 그는 그 기획안을 들고 홀로 상사에게 가서 보고하였다.
그런 일들이 반복됨에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는 그 기획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수정했던 터라, 언제든 다시 관련된 것들을 기획할 수 있지만, Copy & Paste를 한 사람은 그만큼의 고민을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HRer로서의 첫 시작을 멋진 리더의 리더십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리더십도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대학원과 인턴 생활은 내가 꿈꾸고 바라는 이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준비하고 마음껏 그려보는 그런 곳.
그리고 실제 정규직으로 마주한 현실은 냉탕과 온탕이 시도 때도 없이 뒤바뀌는 그런 곳이었다.
햇빛이 쨍쨍하다가도 스콜이 갑자기 쏟아지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해가 뜨기도 하는 다양한 현실들을 접하는.
이제 나는 현실과 이상 그 사이 어딘가에서 중간점을 찾아가는 어엿한 회사원이 되어 가고 있다.
*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이 신입사원이라면, 일의 경중을 떠나서 맡은 업무를 주도적으로 최선을 다해 종결까지 지어보시면 좋겠다. 당장은 모르겠지만 지나고 보면 그 경험들이 엄청난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