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선택의 나비효과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에 '나'에 대해 잘 알게 된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오롯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중반 대졸 백수였던 나에게도 그 시간은 찾아왔다.
100세 시대, 인생을 길게 봤을 때 나는 무엇에 목적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
혹자는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매일을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았으며, 그 시기엔 백수라 시간도 넘쳐났다.
보통의 20대 중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지?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손주 보고 늙어가겠지.
무슨 일을 하고 살 것인가?
나는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결혼을 할 것인가?
좋은 사람이 생긴다면 하겠지만 못할 것 같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안 생겨 연애를 5년이나 쉬고 있으니.
그렇다면 결혼 뒤의 것들이 많이 생략된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손주 보고 늙어간다.
나는 일하다가 늙어가겠구나.
그럼 일에 애정을 담아 워커홀릭이 되어야겠다.
이왕 열심히 일하는 거 멋있게 성공해서 돈이나 많이 벌자.
전기공학 전공자로서 무슨 일을 할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플랜트 엔지니어입니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에서 본 플랜트 엔지니어는 멋있어 보였다.
공장을 설계하고 시공하며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일.
돈 받고 떠돌아다니며 여행처럼 살 수 있다니.
안 그래도 일 밖에 없어 심심할 인생에 안성맞춤 같아 보였다.
남들 따라 공기업을 준비하던 나는 사기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지금은 생각한다.
그냥 진득하게 공기업을 준비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당시에는 유독 공기업의 벽이 너무 높아 보였다. 스펙을 쌓는 족족 합격점 커트라인이 내가 쌓은 점수만큼 올라가던 시기였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크고 작은 선택들이 나비효과로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꾼다.
나는 그렇게 플랜트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 생각 없던 내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결혼 생각이 없으니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그 대답이 뭐였는지 나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내 기억에 그는 서운한 듯했다가, 3년 뒤쯤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자기도 아직 결혼에 대한 확신은 없다고 했었던 듯싶다.
내 mbti는 ISTP다.
어느 날인가 유튜브에서 ISTP들은 기본적으로 회색 세상을 살아간다고 보면 된다는 영상을 보고 공감한 기억이 있다.
그를 만나기 전의 연애들은 나의 흑백 세상을 컬러로 바꿔놓지 못했었다. 간혹 컬러로 바뀌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길게 가지 못했다.
그와의 연애는 달랐다.
그와 무언가 하지 않아도, 그냥 손 잡고 길만 걸어도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는 그를 통해 여행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여행이 너무 재밌고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와 만난 뒤로 친언니와 동남아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언니와의 여행은 여전히 미묘하게 빛바랜 회색조 같았다.
나는 그 여행에서 깨달았다.
그와 여행을 가는 것이 행복한 거구나.
행복이라는 건 무엇을 하느냐 보다 누구와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구나.
만약 이 남자와 헤어진다면 나는 이 남자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의 결론은 '어렵다.'였다.
그는 5년 만에 나타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 남자와의 결혼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나는 워커홀릭으로 평생 혼자 여행하듯 살기 위해 건설업을 택했다. 결혼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손주 보고 늙어간다.
빨간 줄 죽죽 그어 지워놨던 인생의 커리큘럼이 다시 되살아났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손주 보고 늙어간다.
결혼까지는 괜찮았다.
장거리 주말부부라도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다면 여자에게 건설업 현장직은 무리였다.
우리 회사는 설계와 시공 모두 하는 회사였고,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본사와 현장을 불규칙적으로 오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현장의 위치는 전국 곳곳의 산업단지였으며,
연장근무, 조기출근, 주 6일 근무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다정했던 우리 회사는 현장 발령을 일주일 전에 통보하곤 했다. 나는 현장 발령을 통보받은 주 주말에 개인일정을 취소하고 현장 근처로 원룸을 잡으러 내려가야 했고, 그다음 주에 바로 이사해야 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결혼한 아이 엄마가 가지기엔 너무 사치스러운 직업이었다.
일과 가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직 가정이 생긴 것도 아니니 일이 닥치고 나서 생각하면 좋겠지만, 한국은 유독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다.
나는 아직 20대.
신입으로 들어가기에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회사를 낮춰서 가더라도 빨리 직무 전환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현장일을 하기에 체력적으로도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하고 퇴사를 했다.
회사에 입사할 당시 나는 확신했다.
나는 결혼하기 어려울 것이고, 결혼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을 것이라고.
퇴사하며 깨달은 건 내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랑보다 일이 우선이었던 가치관이 일보다 사랑으로 바뀌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돈이나 많이 벌어 나 하나 풍족하게 살자.'던 마음은
'덜 벌어도 괜찮으니 내 가정이 안정적이면 좋겠다.'로 바뀌었다.
퇴사하고 열심히 하다 보면 금방은 어려워도 취업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앞전에 현장직이 체력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던 말 기억하는가?
나는 몸에 이상이 있었고 수술이 필요했다.
의대생 증원 문제로 인한 의료 공백의 여파로 수술은 몇 달 뒤로 잡혔다. 나는 취업을 할 수 없었고, 몸은 수술로 인한 문제 외에도 자꾸만 아파왔다.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내가 행복한 가정을 꿈꾸던 그 남자는 나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며 이별을 고했다.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이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힘든 순간에 홀로 남겨진 나는 많이 아팠다. 대단한 사랑의 결말은 이토록 초라하다.
직장 잃고, 건강 잃고, 사랑 잃은 사람을 품어주는 건 가족 밖에 없었다. 초라한 내 곁에 있어주는 가족이 고마웠다.
그를 여전히 사랑했지만,
그처럼 불안정한 사람이 내가 원하는 안정적인 가족을 완성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를 잃기로 했다.
그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나의 가치관은 여전히 일보다 가정이다.
그에게 버림받았지만 내 곁에 가족들이 남았기에 오히려 가치관은 더욱 단단해졌다.
이별을 고하던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기억한다.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랄게."
그럴 것이다.
너는 그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빌기를 바란다.
나는 그의 행복을 빌어주지는 못했다.
내가 아팠던 만큼 그도 조금이나마 돌려받길 바랐다.
아픈 시련도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다.
시련에서 배운 것들을 기반으로 나는 또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 선택들로 하여금 또다시 나의 가치관은 변화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시련을 주는 이유는 큰 복을 주기 전에 당신이 그 복을 받을만한 사람인지 시험하는 거라고.
시련 끝에 나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시련 없이 성장하지 않는다.
나는 시련 끝에 성장할 것이다.
All is well.
모든 것이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시련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혹시 시련 속에 고통받고 있다면,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해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나는 이 새벽이 두렵지만, 새벽 속에 느껴지는 어둠과 조용함을 오롯이 느끼기로 했다.
다가올 아침의 햇살이 더 환하게 느껴질 테니.
당신만 새벽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은 끝이 없어 보여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
아주 어두워 보이지 않겠지만 당신 곁에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나도 가끔 넘어지고 엎어져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다.
한참을 엉엉 울고 엎어져있다가, 엎어져있는 일 마저 지겨운 생각이 들 때 다시 일어나 저벅저벅 걷는다.
힘들면 다시 엎어질 것이다.
수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다고 내 새벽이 마냥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새벽이라는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침에 가까워지고 있다.
삶이란 매일매일 하루를 살아내는 것.
하루는 낮과 밤이 반복되는 것.
지금의 당신이 밤을 걷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낮이 온다.
그러니 우리 희망을 잃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