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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로미 Jun 02. 2020

단 한 번도 이렇게 집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필리핀에서 두 달 살기 - 열한 번째 이야기

집순이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학원에서 휴업을 하겠다는 문자가 왔다. 약국, 슈퍼마켓, 음식점 등 정말 필요한 가게가 아니면 문을 닫는 상황이니 학원도 문을 닫는 것은 이미 당연히 예상된 결과였다. 결국 꽤 비싸게 주고 산 교재는 3과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조카의 학교도 개학이 계속 미뤄지다가 결국 온라인으로 개강을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필리핀의 인터넷은 상당히 느리기 때문에 인터넷 강의는 원활하지 않고 버퍼링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요금을 바꾸려고 해도 회사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생활의 불편함과 무료함이 아니었다. 공항도 폐쇄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상식상 입국하는 사람만 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출국도 막는다고 한다. 즉, 3일 안에 한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언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번도 여행 중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여행이 너무 좋아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펑펑 운 적이 있을 정도로. 하지만 가고 싶든지 가고 싶지 않든지 내 의지와 마음과 상관없이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다른 상황이었다. 


락다운은 4월 15일까지 예정이고 내 비행기는 4월 22일이었지만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연장도 가능하다. 다급한 마음에 발권했던 여행사에 연락을 해 봤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놀랍게도 3월에 귀국할 수 있는 비행기는 전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채팅 상담을 하고 상담사가 조회를 하는 사이에 계속 비행기 표는 밀려서 결국 락다운이 끝난 4월 17일에야 갈 수 있다고 한다. 귀국행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부지런히 스카이스캐너를 돌렸지만 역시 비행기표는 없었다. 직항은 물론 경유를 해서 가야 하는데 경유지가 중국이거나 이미 한국인을 입국 금지한 곳이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한인회에서 전세기 요청을 한다는데 그거라도 신청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언니가 어디에서 정보를 들은 모양이다. 사실 내가 머무르는 지역의 한인회는 아니었지만 지금 사정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나도 일단 전세기 요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단체 채팅방은 삽시간에 600명의 사람이 모였다. 정보에 따르면 대기 예약을 걸어서 내일, 그리고 모레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다시 컴퓨터를 켰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 표를 항공사를 통해 예약을 한 것이 아니라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했고 여행사에서는 대기 예약을 걸어줄 수는 없다고 한다. 항공사보다 저렴하게 예약하려고 여행사를 선택했는데 내 선택에 후회할 시간도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미 산 귀국행 비행기표를 환불받더라도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대기 예약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지금 필리핀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친구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여행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급하게 톡을 보냈다. 다행히 친구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공감을 해주며 무려 1시간 반을 기다린 후에 상담원과 연결이 되었다. "언니, 내일하고 모레 아침, 저녁 총 4개 예약할게. 비용은 63만 원 정도 될 거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왕복 비행기를 30만 원대에 샀는데 편도행 비행기를 이 가격에 다시 살 줄이야. 물론 그마저도 표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루 종일 핸드폰과 노트북만 붙잡고 있었다. 한인회 채팅방에 나오는 정보를 계속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갑자기 한줄기 빛과 같은 메시지. "지금 대한항공 나왔어요. 48만 원." 사실이었다. 야간 외출이 금지된 상황이어서 밤 비행기라면 굉장히 이동이 어려울 텐데 시간도 딱 낮시간이었다. 결제가 완료되기까지 불안한 인터넷 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다행히 결제 완료가 되었고 언니와 조카에게 내일모레 떠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언젠가 찾아올 이별이었지만 나의 베스트 프렌드 조카는 충격이 쉽게 가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날이 딱 하루가 남았다. 손에 꼽을 정도로 외출을 했고 "여기 정말 좋다. 다음에 또 오자."라고 했던 모든 곳이 폐쇄되었다. 우리에게 다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 시간을 충분히 만끽했을 텐데. 아쉬워하던 중 대한항공에서 온 메시지. 스케줄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필리핀 정부에서 방침을 바꾸어 꼭 3일 안에 출국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럼 단 며칠이라도 더 있다 가면 안 되겠냐는 언니와 조카의 애원에 힘들게 산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다행히 항공사 측의 변경이었기에 무료로 취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든 꼭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다시 티켓팅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단 기존에 샀던 항공사 티켓의 리턴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엄청난 대기 속에서 상담사와 연락이 닿았고 일주일 뒤 비행기 표를 얼마 간의 수수료를 내고 변경을 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는 야간 통행이 매우 엄격하여 꼭 낮 비행기로 가야 했는데 구매한 항공권의 스케줄이 야간으로 변경되었다. 항공사 전체적인 스케줄이 축소되어 당분간 밤 비행기만 운영이 된다고 한다. 결국 이 항공권은 환불하고 다시 낮에 출발하는 대한항공 티켓을 구매하기로 했다. 그래도 처음에 구매한 비행기보다는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 표 역시 야간으로 일정이 변경되었고 더 이상의 티켓팅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어 밤 비행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루 종일 비행기표를 조회하고 상담사와 연락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계속 핸드폰만 봤더니 조카가 잔뜩 화가 났다. 이제 조카와 놀아야겠다. 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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