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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로미 Jun 02. 2020

이 곳은 슈퍼마켓인가, 놀이공원인가?

#필리핀에서 두 달 살기 -  열두 번째 이야기

필리핀에서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영어 공부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잠시 접어두었다. 솔직히 말하면 인터넷이 너무 느려서 듣기 파일이나 유튜브가 전혀 재생이 되지 않았다. IT 강국 한국에서 자가격리 기간 동안 교재를 보고 혼자 공부할 예정이다. 남은 시간 동안 언니와 조카의 행복을 위해 힘쓰기로 했다. "이제 나 돌아가면 삼시세끼 차리고 설거지도 세 번씩 해야 되는데 그냥 내가 다 할게." 보통 설거지를 반반씩 언니와 돌아가면서 했었는데 이것도 얼마 못 해준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언니의 일손을 덜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조카에게도 그림 한 장이라도 더 그려주고 이야기도 더 많이 해주면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 충실하고 있다. 


그럼 한국에 있는 지인들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보통 여행지에서 돌아갈 때 작은 선물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놈의 코로나 때문에 뭐라도 사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슈퍼마켓은 열었고 언니 집과 불과 5-10분 거리이기에 언니의 심부름도 할 겸 슈퍼마켓 나들이에 나섰다.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었는데 이곳도 코로나를 대비하기 위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미 수영장은 문을 닫았고 엘리베이터에 투명 필름을 부착하고 수시로 소독하고 있었으며 엘리베이터 내부도 거리두기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직원도 최소화되어 자주 인사를 나누던 안내 데스크 직원도 없어졌다. 항상 친절했던 직원들이 언제 끝날지 모를 휴업에 들어간 상태가 된 걸 보니 남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슈퍼마켓에 다다르니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집을 나서기 전에 언니가 기다리고 물건을 사는 시간이 30분 이상이 될 것 같다면 미련 없이 돌아오라고 했다. 내 앞의 인원은 15명 정도. 그래, 이 정도면 기다릴만하지.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은 사람은 찾기 어려웠고 기다리는 줄도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실외에서 기다리니 그렇게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10여분을 기다리고 드디어 슈퍼마켓 내부로 입성. 그러나 그 안에서도 또 줄이 있었다. 슈퍼마켓 안까지 줄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마치 이건 롯데월드의 혜성 특급을 연상시켰다. 롯데월드 혜성 특급도 입장하기 전까지 줄이 있고 놀이기구를 타기 전까지도 내부에서 꼬불꼬불한 줄을 서면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런 시스템인 줄 모르고 앞에 있는 줄만 보고 얼마 안 기다릴 거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내부를 살펴보니 계산대 줄도 만만치 않다. 30분 컷은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돌아서려는 순간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발견했다.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억울했다. 계속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조카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쓸어 담았다. 다행히 아이스크림은 줄을 서지 않고 근처 와인샵의 캐셔에게 계산할 수 있었다. 사고 싶은 것은 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조카의 미소를 보니 영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나름 오픈 시간인 12시에 맞춰서 간 거였는데 이렇게 낭패를 볼 줄이야. 뒤늦게 인터넷을 찾아보고 안 사실인데 슈퍼마켓 오픈 시간이 오전 9시로 바뀌었다고 한다. 생필품이 당장 필요한 사람도 있으니 잠시 시간을 바꾼 모양이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음날은 오픈 시간에 맞춰 나갈 준비를 했다. 선글라스, 마스크, 위생장갑, 그리고 긴 팔, 긴 바지에 완전무장을 하고. "30분이야. 그 이상이면 그냥 와!" 언니의 목소리도 저 멀리서 들린다. 드디어 슈퍼마켓에 도착. 오늘도 눈치게임 대실패다. 슈퍼마켓 입구에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보니 오늘도 안 될 것 같다. 너무나 아쉽지만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에 아쉬워서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에 내가 사고 싶은 것은 없지만 산미구엘이라도 사서 마실 생각에 에코백에 산미구엘을 쓸어 담았다. 한국에도 산미구엘 맥주가 있기는 하지만 레몬 맛, 사과 맛, 리치 맛 등 과일 맛의 달콤한 맥주는 여기에만 있기 때문이다. 씁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데 슈퍼마켓 봉지를 든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부지런하기에 성공했을까?


다음 날도 집에서도 보이는 슈퍼마켓 줄을 보면서 슈퍼마켓을 가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필리핀에서 먹었던 맛있는 간식거리를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뿐이다. 별로 없는 간식이지만 언니가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털어서 내 캐리어에 담아주었다. 이 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땐 슈퍼마켓에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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