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에서 두 달 살기 - 아홉 번째 이야기.
형부, 언니와 함께 있는 단체 채팅방에 갑자기 알림이 울렸다. "오늘 대통령이 락다운 발표할 거래. 빨리 물, 라면, 생필품 준비해." 말로만 듣던 도시 봉쇄령이 내려졌다. 3월 15일부터 4월 14일까지 한 달간. 아직 공식 발표 전이었지만 단순한 카더라는 아닌 듯했다.
갑자기 분주해졌다. 형부는 아직 퇴근 전이라 언니는 혼자 슈퍼에 가고 나는 조카와 집을 보기로 했다. 하지만 연약한 언니가 혼자 물을 몇 통이나 사 올 수 있겠는가. 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빨리 함께 다녀오자고 했다. 조카도 같이 가기를 원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 데리고 가기도 몹시 꺼려지는 상황이었다. 언니는 조카에게 급하게 유튜브를 보여주고 나는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휴대전화를 손에 쥐어주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아이들만 있는 집에 불이 나는 안타까운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어린이집과 학교는 문을 닫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던 엄마가 할머니 댁에 아이들을 맡겼는데 잠시 할머니가 빵을 나가러 간 사이에 발생한 참사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집에 혼자 두고 온 조카가 내내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여 발걸음이 급해졌다.
다행히 집 근처에 대형 쇼핑몰이 있었다. 앞으로 은행 업무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ATM에서 급하게 현찰을 인출했고 언니는 마트로, 나는 휴대전화 매장으로 향했다. 여기에서는 매월 요금제를 내는 것이 아니라 프리 페이드 카드를 사서 충전하는 방식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카드가 없으면 전화나 문자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한 달이라고 했지만 언제까지 봉쇄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것도 충분히 필요했다. 사람들의 생각은 똑같기에 휴대전화 매장도 붐볐다. 기다리는 사이에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이모야. 잘 있어? 별일 없어?" "응"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동영상을 보는 조카는 방해가 되었는지 상당히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그사이에 언니에게 온 전화. "슈퍼 줄이 끝이 안 보여. 여기에서 못 살 것 같아." " 그래, 그럼 빨리 집으로 가." 여기서 기다리면서 바이러스에 걸릴 것 같다는 언니의 말에 안전한 집으로 어서 돌아가라고 했다. 내가 무사히 사 간 카드로 전화를 충전한 언니는 여기저기 배달이 가능한 곳에 전화를 돌렸다. 알고 있는 한인 마트에 전화를 해서 유통기한이 긴 냉동식품과 레토르트 식품, 그리고 물 등을 빨리 주문했다. 오늘 당장 가져다줄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주문은 성공했으니 한시름 놓았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정신없던 하루를 보내고 9시경 늦은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이제 도시 봉쇄령이 내려지면 외출도 못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글쎄." "여기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집에만 있어야 하면 시간이 아깝잖아." "그래.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볼게." 점점 더 이곳 생활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또 내 계획을 방해하는 잔인한 바이러스. 아마 2020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