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했던 하루의 끝, 상상 코로나
#필리핀에서 두 달 살기 - 여덟 번째 이야기
오늘은 언니의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이다. 나에게는 특별한 상황이지만 언니에게는 일상이기 때문에 언니의 사회생활을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모처럼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에 신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도 코로나에서 자유로운 상황은 아니기에 최소한 바깥에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먼저 학원 시간을 바꿨다. 오전이 아닌 오후로 시간을 바꾸니 혼자 예습, 복습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오늘도 알차게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기 1분쯤 남았을까. 뙤약볕에서 마스크를 쓰고 걸어와서 무리가 되었는지 갑자기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가뜩이나 모두가 예민한 시국에 쉽게 멈추지 않는 기침 때문에 선생님도 몹시 불안해 보였다. 옆 교실에서도 침묵하며 나의 기침 소리가 잦아지는지 지켜보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오늘 날씨가 너무 더운데 무리해서 그런 것 같다고 변명했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는 듯했다.
어쨌든 나에게 남은 시간이 있어서 근처 슈퍼에서 간단히 먹을 걸 사기로 했다. 현지 슈퍼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고 평소에 군것질을 아주 즐기진 않지만 외국 과자를 먹어보는 것도 좋아해서 최대한 간격 유지를 하며 먹거리 쇼핑을 했다. 이 날따라 유독 사람이 많기는 했다. 그리고 나처럼 간식류를 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훗날 이게 사재기의 시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슈퍼마켓에서 나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중에 하나인 드로잉 카페로 향했다. 장난감 가게 한쪽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작은 미니 캔버스 하나에 한화 5천 원이면 가능하니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 완벽한 곳이다. 보통 조카와 함께 오면 조카의 컨디션에 따라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은 여유 있게 그려볼 참이다. 마침 손님도 나 하나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그렸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그리니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그렇게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는데 아까 기침의 여파 때문인지 목도 아픈 것 같고 몸도 안 좋다. 서둘러 코로나 초기 증상을 찾아보니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열을 재 보니 36.8도. 37.5도 이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방문을 걸어 잠갔다. 밥도 방문 앞에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조카는 계속 놀아달라고 하지만 '이모는 아프면 한국에 가야 해.' 언니의 단호한 말투에 조카는 쉽게 물러섰다.
사실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고 생에 엄청난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의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 바이러스는 잔인하게도 여기저기에 민폐를 끼친다는 문제가 있다. 당장 가족들, 특히 어린 조카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이고 오늘 내가 만난 선생님, 카페 직원들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나를 스쳐간 사람들도 감염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정말 진짜 코로나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다행히 감기약을 먹고 푹 자고 일어났더니 더 이상 열이 나지 않고 증상도 완화되었다.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