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탈리아 일주일 기행 Lago di Garda - Molveno
60대 후반 부부와 이탈리아 붙박이 조카의 한여름 이탈리아 여행
02. 이탈리아 일주일 기행 Milano Malpensa - Lago di Garda - Molveno
체크아웃
정말 푹 잤다. 조용한 숙소 덕분이였을까 알람을 맞춰놓지 않았다면 분명 정오가 되서야 일어났을 것이다. 어제오후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게 오늘 체크아웃을 해야한다. 여기서 말펜사 공항까지 2시간 좀 안되게 걸리니까 아침먹고 바로 출발하면 이모부부가 도착하는 시간에 넉넉히 맞출 거 같다.
아쉬워야 또 오지, 맘을 달래면서 풀지도 못한 캐리어를 그대로 차에 싣는다. 아침식사는 동생이 운영하는 바에서 먹으라고 했지. 간단하게 커피랑 브리오쉬를 줄건가 싶다.
아직 아침인데도 날이 벌써 뜨겁다. 산 위쪽도 여름인건 변함이 없이 오늘도 날이 좋을 것 같다.
아침 먹으러 왔어요,
바에 들어가자 마른 근육질과 짙은 인상의 남동생이 맞이해준다. 바다에 다녀왔는지 피부가 꽤나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남동생은 베르가모 지역의 사투리를 쓰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데는 꽤나 애를 먹었다. 특유의 억양과 발음은 보통 이탈리아어보다 훨씬 더 리드믹하게 들렸다. 그래도 이정도는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사투리다. 얼마전에야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본 시칠리아 람페두사 Lampedusa 섬을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Fuocoammare (Fire at sea *제목도 사투리 그대로 사용했다) 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표준어 자막으로 봐야 할 정도였다. 이탈리아는 언어가 지역마다 상당히 다르다.
내가 오늘 떠난다고 하니 남동생은 어제 왔지 않냐고 묻는다. 네, 저도 아쉽습니다.
여기서 공항가는 길이 막힐까 물어보자 '이 시기는 괜찮을거에요, 아침 먹을 자리는 저기 준비해뒀어요' 라며 다정하게 말해준다. 아름다운 장소에 사는 사람들은 품성도 고와지나보다.
자리에 앉아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뷰가 꼭 그림을 걸어둔 것 같다. 울랄라. 정말 로맨틱한 아침이다.
색깔별로 알록달록 잘라놓은 과일플래터와 두가지의 브리오쉬, 요거트와 종류별로 놓여있는 과일잼과 꿀. 라임슬라이스와 허브로 장신한 신선한 오렌지주스. 토스트한 빵에 퍼펙트하게 구운 계란후라이까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차려놓은 아침상을 보니 정교하고 품위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스타일이 보이는 듯 하다. 따지고보면 별거 아닌 재료들인데도 이렇게 우아하게 갖춰내다니, 접시 한개라도 한번 더 손을 써서 놓은 티가난다. 이런 자세와 재능은 정말이지 배우고 싶다. 나는 타고나길 섬세하지 못하고 귀품이 없는 성격이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감탄은 잘 할 자신이 있다.
다정하고 쾌활한 남동생은 요리에 굉장한 실력을 갖고 있는게 분명했다. 토스트에 계란을 구워줬는데 계란의 굽기가 완벽에 가까웠다. 이런 계란후라이라면 매일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바사삭 베어무는 토스트는 기분좋은 소리까지 맛을 더한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아침이라니. 이렇게 기분좋은 감정을 이런 낯선곳에서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단지 토스트와 계란후라이를 먹으면서 말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내 행복에 좀더 너그러워져야겠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준 정성 넘치는 아침을 즐긴다. 브리오쉬가 로마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더 우아한 맛이 나는건 나의 착각이겠지.
혼자서도 잘 먹고 잘 논 하루는 이제 끝냈다, 언젠가 또 올게.
이제서야 하루 시작이다. 이모부부를 만나러 공항으로 가야한다.
공항가는 길과 점심
말펜사 공항은 밀라노 시내에서도 한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다. 밀라노 근교의 산업단지 지역들을 지나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공항까지 수월하게 도착했다. 오늘따라 사람도 얼마 없어보인다.
그늘도 없는 주차구역에 차를 놓고 공항 안으로 들어간다. 도착 문구가 적힌 게이트 앞에서 어정쩡히 서서 기다리기로 한다. 이모부부는 거의 이년만에 본다. 얼굴 본지가 벌써 그렇게나 됐나 싶어하는 참에 두분이 게이트로 나오신다.
오오! '야~ 잘있었나~' 이모는 여전히 고운 인상에 안경을 바꾸셨고 쌍커풀이 진한 인상의 이모부는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지셨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에는 서로 반가움이 가득하다.
먼저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오늘 점심은 따로 예약해둔 곳이 없는데 공항 근처 시내에 가면 뭐라도 있겠지 싶어 구글 맵으로 시내가 좀 커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본다. 이모부는 꽤나 오랜만에 얼굴을 대면하는지라 어색해 하시지 않을까 했지만 괜한 걱정이였다. 어제 만난 사람처럼 익숙하다. 아마 이모부의 활기찬 성품이 한 몫하는 것이리라.
8월이라 그런지 식당이며 빵집이며 전부 닫았다. 관광지역이 아니니 다들 휴가를 간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텅텅 비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한두군데 오픈한 식당이 있겠지 하고 길을 몇바퀴 돌아본다. 코너쪽에 문연 오스테리아가 있다.
나는 아침을 거하게 먹어 간단하게 먹을 생각이였고, 두분도 긴 비행으로 식욕이 덜 하시다기에 간단히 요기하기로 식당은 괜찮아 보였다. 조용했던 바깥과는 달리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을이 텅텅 비어있길래 다들 휴가가고 식당에서 점심 먹는 이가 있겠나 싶었는데,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이 식당으로 모인 모양이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5분 정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행히 타이밍에 맞춰 일어나는 테이블이 있어 앉을 수 있었다.
실내는 정갈하고 붉은 벽돌로 벽을 장식한게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 의자와 테이블도 운치있고 테이블 러너도 차분한 색감이 식당에 잘 어울린다.
웅성웅성 먹으면서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로 '프란체스카는 돌아왔어? La Francesca è tornata?' 라는 말이 들린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로마에서는 들을 수 없는 건데 북부 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고는 들었다. 원래 이탈리아어에서는 사람 이름 앞에 정관사를 붙이지 않는다. 프란체스카는 그냥 프란체스카지 'La 라' 를 붙이지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혹시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면 북부출신이라고 보면된다. 로마에서는 친구들이 북부 사람들 흉내낼 때 곧잘 하는 표현이다. 사람들 대화만 듣고 있어도 이탈리아가 지역별로 정말 다르다는 걸 또 느낀다.
텅 비어있는 마을을 보다가 사람 가득한 식당에 들어오니 우리도 활기차지는 느낌이다. 없던 식욕도 생기는거 같고. 나도 이들처럼 왁자지껄 점심을 먹어야만 할 것 같다.
메뉴는 단품도 있었고 점심에는 정해진 메뉴 Menu Fisso 라고 점심특선메뉴 같은게 있다. 보통 주변 직장인들을 위한 메뉴같은건데 Primi (곡물류) + Secondi (메인요리) + Contorni (사이드디쉬) 해서 13유로. 원한다면 식사 요리 중 하나를 디저트로 바꿀 수도 있었다.
음식양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으나 다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기에 우리도 분위기에 이끌려 코스메뉴를 고르기로 한다. 메뉴 자체는 특별히 밀라노식 요리라던지 이탈리아 북부 요리라고 하는건 없었다. 나는 완두콩이 들어간 키쉬와 구운감자와 디저트, 이모와 이모부는 펜네 토마토 파스타와 구운 닭고기와 볶은 야채를 부탁한다. 겨울이였다면 폴렌타 (Polenta) 가 있었을 텐데 여름이라 그런지 아쉽게 메뉴에는 없었다. 폴렌타라 하면 메밀이나 옥수수가루를 물에 풀어 우리나라 묵처럼 쑤어먹는 요리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유명하다.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음식으로 취급됐지만 요즘에는 겨울이 긴 북부지역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다.
식당은 천천히 음식이 나왔는데 맛은 무난했다. 간이 그렇게 세지 않아 다행이였다. 의외로 식당 음식같지 않게 담백했다. 집에서 만든 것 같은 심플함이 좋았다. 키쉬는 이탈리아에서 Torta salata 또르따 쌀라따 라고 하는데, Torta 또르따가 보통 달달한 케이크를 말하니, 소금을 넣은 식사용 케이크를 이렇게 부른다.
파스타를 한입 얻어먹었는데 내가 평소 먹던 것보다 더 익힌것 같아 두분이 드시기에는 괜찮은 삶기다. 이탈리아의 파스타 삶기 정도는 Pasta al dente 알덴테 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알덴테의 삶기는 덜 삶은 것도 푹 삶은 것도 아닌 딱 적당하게 삶아진 상태다. 그런데 다른나라 사람들이 먹기에는 덜 삶아진 식감일 수 있다. 유럽에서도 유독 이탈리아 사람들만 알덴테로 삶아먹는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로 갈수록 훨씬 더 알덴테로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개인 취향이지만 나는 조금 과장해서 스파게티면이 아직 꽂꽂한 상태일 정도로 덜 익혀먹는 걸 좋아한다.
이모는 그래도 익숙한 토마토소스라 먹을만 하다고 하셨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오늘 일정 얘기를 한다. 오늘의 최종 숙소 목적지는 몰베노 Molveno 호수다.
'가는 길에 가르다 호수 Lago di Garda 를 들리는데, 리모네 술 가르다 Limone sul Garda 에서 산책 겸 사진도 찍고요, 리바 델 가르다 Riva del Garda 가르다호수 북쪽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 저녁 예약해놨습니다.' 리바 델 가르다 Riva del Garda 는 윈드서핑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모부는 지금보다 젊은 시절에 왔으면 해보지 않았을까 하시며 아쉬워하신다.
몇마디 안한 거 같은데 어느해 시간이 벌써 오후 3시가 되간다. 그래도 여름이라 해가 늦게 지니 오후시간은 충분하다. 먼저 들릴 리모네 술 가르다 Limone sul Garda 까지는 2시간 반정도 걸릴 거 같다. 5시좀 넘어서 도착하면 호숫가 구경도 하고 젤라또도 먹고 쉬다가 저녁 7시쯤 예약한 식당으로 가면 될 것 같다. 다만 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오셔서 당일에 다시 차를 타고 긴시간 이동을 하시는 두분이 걱정이다. 피곤하실 각오하시고 오셨냐고 묻자 이모부는 이번 여행을 위해 체력을 길렀다고 호탕하게 자랑하신다. 아마 그래서 살이 쪽 빠지셨나보다.
가르다호수 Limone sul Garda
배는 무거워졌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가르다 호수로 간다.
북부의 더위도 로마의 여름더위 못지않게 뜨겁다. 고속도로 아스팔트위로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어른거린다. 그래도 차로 이동하니 다행이다 싶다. 차멀미를 하는 이모가 내 옆좌석에 앉고 이모부는 찐한 쌍커풀 눈으로 뒷좌석에서 앞유리창을 내다보신다. 한숨 주무셔도 된다고 말하지만 아직은 괜찮다신다.
오후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문득 생각이 났는데, 밀라노 근처에 세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든 고속도로가 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세기 전만해도 도로는 사람과 마차와 말들과 모터가 달린 자동차들이 뒤섞여서 다니던 시절이였다. 이탈리아의 한 엔지니어가 모터가 달린 것만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자는 프로젝트를 내어 만들어 진 것이 지금의 고속도로다. 이탈리아 지도를 구글맵으로 자세히 보면 A1, A35, A70 등 도로가 보일 것이다. A는 Autostrada 오토스트라다 고속도로라는 뜻이다. 1924년도쯤에 처음으로 통행료를 내고 모터로 움직이는 차들이 다니는 고속도로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세계최초의 고속도로는 지금은 A8 도로의 한부분으로 남아있다고 들었다. 이모부는 내 이야기에 이탈리아가 처음 아이디어를 내서 만들었다니 믿기 어렵다는 눈치시다. 요근래의 이탈리아는 어디가서 딱히 대접받지 못하는 형국인가보다.
베르가모 Bergamo 와 브레샤 Brescia 아름다운 도시들을 눈앞에서 내려놓고 고속도로를 빠져나간다. 금방 산들이 보이고 올리브 나무들이 나타나는게 곧 호수가 근처인가 보다. 그런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엉금엉금, 차라리 걸어가는게 더 빠를정도다. 호수를 따라 나있는 도로는 한차선에다가 한창 휴가철이니 어쩔 수 없다. 독일 차량번호판의 차들과 캠핑카들이 가득하다. 이쪽 지역은 특히 독일인들에게 인기 휴양지라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독일어도 유창하다.
본격적으로 가르다호수가 나타나자 기분이 좋다. 호수든 바다든 물을 보면 왜이렇게 흥분되는 것인지, 우리는 땅보다는 바다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멋들어진 산위에 지어진 별장들과 아기자기하게 가꿔진 호숫가 옆의 빌라들, 올리브나무와 출렁이는 요트, 해변타월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끼고 걷고있는 사람들을 보니 휴양지가 여기구나 싶다. 이모부부는 이탈리아에 이런데가 있었냐며 감탄하신다. 이렇게 좋아하시는걸 보니 짧은 일정이 더욱 아쉽다.
도로 옆으로 온통 호텔과 개인 빌라들이라 주차공간을 한참을 헤맸다. 다행히 큰 공용 주차장을 찾아내 잠깐 물 근처에 내려보기로 한다. 호수 반대편으로 보이는 산들의 시야가 탁했지만 날씨는 좋았다. 바람도 솔솔 불어오는 것 같고 멀리 가는 유람선에 손도 흔들어 본다. 이모는 호수가 바다 같다며 높은 산들이 이어지는 풍경이 멋지시단다. 예전에 같이갔던 이탈리아 남부랑은 또 완전히 다르다면서 좋아라 하셨다. 이제는 낯선 외국도 시큰둥 하실 나이신데도 목소리가 초롱초롱하게 감탄하시니 감사한 마음이다.
일부러 여기를 오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리모네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도 언급되는 곳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레몬나무와 올리브나무, 과일나무들이 경사진 산턱에 줄지어 심어져 있던 모습을 괴테도 감상했을 것이다. 여전히 가르다 호수는 곳곳의 마을들이 빼어난 경치로 풍부하다. 이모에게 의도치않게 괴테의 발자취를 찾아 오게 됐다고 하니 이모부는 친구들에게 알려줘야 할 게 늘었다며 신나하신다.
호수를 남쪽에서부터 북쪽까지 이동하면서 보다보면 어느지점부터 유람선같은 커다란 배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가르다 호수는 워낙에 커서 이탈리아의 세 주에 걸쳐 있는 호수다. 우리가 있는 리모네 술 가르다 Limone sul Garda 여기는 롬바르디아 Lombardia 주에 속한 호수이고 반대쪽은 베네토 Veneto 주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리바 델 가르다 Riva del Garda 호수 북쪽은 트렌티노 Trentino 주에 속해있다. 이탈리아는 주 별로 법령이 다른데, 트렌티노 쪽에서는 환경보호 차원으로 모터달린 배들은 호수 위를 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거대한 유람선은 롬바르디아와 베네토에 속해 있는 호수 쪽에서만 보인다. 특별자치주 중 하나인 트렌티노 지역은 특별자치법령과 행정으로 운영되는 지역이다.
즐거워 하시는 두분 인증샷을 여러차례 찍어드리고 저녁식사 예약한 식당으로 간다. 아까 차가 막힌 탓에 어느새 저녁 7시반이 되간다. 저녁식당에서 오늘 밤 묵을 숙소까지는 1시간가량 더 가야한다. 숙소에 밤늦게 도착할거라고 전화를 해놓는 편이 나을거같다.
저녁식사
바다같은 호수를 보며 아쉬움을 남겨두고 식당으로 이동한다. 리바 델 가르다 Riva del Garda 에 위치해 있는 도로 변 옆에 식당인데, 식당 이름에 Agriturismo 아그리투리즈모 *농가민박 가 붙어 있는걸 보면 포도밭이랑 올리브밭에서 와인과 올리브오일을 직접 재배하는 모양이다. 인터넷에서 사진만 보고서는 포도밭 사진이 있길래 산 중간에 위치해 있는 곳인가 싶었는데 바로 도로변에 위치해 있어서 의아하긴 했다.
찐한 분홍색이 칠해진 커다란 건물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갑자기 야외 넓은 평지에 포도밭이 가득하고 주위에는 쏟아질 것 같은 큼지막한 돌산이 둘러서 있다. 위치가 기가막히는구나. 오래돼 보이는 올리브나무와 일자로 나즈막히 줄지어 놓은 포토밭이 예술가의 손길을 받은 것처럼 아름답다. 주위에 산이 높아서 그런지 아직 노을 전일텐데 벌써 해가 산뒤로 사라졌다.
앞에 포도밭을 두고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테이블에는 우리말고 메뉴를 보고 있는 가족손님뿐이였다. 이모부는 야외 풍경이 좋다며 우리가 통째로 빌린 것 같다고 하신다. 아까 오후의 더위도 한김 갔다.
여행 첫날이니 와인으로 축하를 해야지 싶어 와인과 메뉴 몇가지를 고른다. 메뉴는 종류가 많지 않고 심플했다. 나는 운전 때문에 와인은 맛만 봐야하니 이모부가 원하시는 것으로 고르기로 한다. 이집에서 만드는 라그레인 Lagrein 레드와인을 정하고 메뉴를 주문한다.
바로 와인을 가져와 오픈해줬는데, 라그레인 Lagrein 포도는 이 지역에서 재배하는 토착품종 중 하나다. 이모가 맛을 본다. 이런 뷰의 저녁식사 자리라면 어떤 와인이여도 다 좋을 것 같다. 나도 레드와인을 손가락 두마디 정도 잔에 따르고 우리는 여행의 시작을 축하하는 잔을 부딪힌다.
곧장 치즈와 염장한 햄 플래터가 나왔다. 쿰쿰한 향의 숙성된 치즈와 양파 쳐트니와 꿀은 강한 맛이지만 부드러운 조합이다. 좋은 품질의 재료인지 향과 맛이 풍부하고 깨끗하다. 이모는 치즈를 맛보고는 절레절레 하신다. 염장햄도 반응이 신통치 않다. 반면 이모부는 와인과 염장햄을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홀짝홀짝 감칠맛 나게 드신다. 미식가 흉내를 내시며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의 지방이 입안 전체에 퍼지면서 와인을 곁들이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질감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며 어느새 잔을 비우셨다. 이모는 그 모습을 보며 웃으시니 나도 마음이 따뜻해 진다. 그래도 앞으로 두분 식사가 걱정되긴 마찬가지다. 바닷가 출신이신 두분이 산악지역과 내륙지역의 음식들로 가득한 일주일을 잘 버티실 수 있을까. 술맛과 포도밭 얘기를 하는 깜짝할 사이에 식당은 손님들이 몰려왔다. 우리를 포함해서 두 테이블이 였던 식당은 꽉 차고 밤이 어둑해지고 있다. 여름밤을 길게 즐기려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모와 내가 주문한 숭어구이와 이모부의 안심스테이크가 나왔다. 어디 호수에서 잡았다고 적혀 있었는데 금새 잊었다. 숭어구이는 맛이 좋았다. 크지 않은 숭어에 소금과 허브만 뿌려서 구워냈는데 여름에 잡았는데도 이정도 맛이라면 맛이 제일 좋은 시기에 먹으면 정말 제대로 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고소하고 신선하다. 나는 강물에서 나온 생선은 흙맛이 나 꺼리는 편인데, 살이 보드랍고 비린맛이 없었다. 이모도 숭어구이는 괜찮게 드신다.
가르다호수의 올리브오일을 곁들여서 그런가. 이 지역의 올리브오일은 예전부터 이탈리아 사람들이 인정하는 최고급 오일이다. 지중해의 태양과 호숫가의 바람과 돌로미티로 이어지는 산의 향이 더해져서 그럴 것이다. 한번 맛보면 그 맛을 기억하게 만든다. 내가 올리브오일 맛을 얘기하고 있을 때 이모부는 마지막 와인방울을 잔에 떨구시며 좋은 저녁이라고 즐거워하신다.
레스토랑의 조명이 진작에 켜져서 더 반짝이고 있다. 앞에 포도밭이 안보일만큼 깜깜해지고 저녁도 두둑히 먹은 우리는 아직 갈길이 남았다. 오늘 밤은 몰베노 Molveno 호수 마을에서 묵는다. 나는 몇번 다녀온 곳인데 이모부의 위시리스트에 들어 있던 곳이다.
몰베노 숙소로 가는길
와인을 드시고 기분이 노곤해지신 두분은 차를 타자 금방 눈을 감으신다. 피곤하시리라. 도로는 가로등만 띄엄띄엄 켜 있을 뿐 껌껌하니 한산했다. 어둠때문에 도로 옆을 휘 감고 있는 돌산과 포도밭을 두분이 못보시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한시간쯤 지나자 검은 물의 호수가 도로 옆으로 보이고 멀리 앞에 마을에 불빛이 가득하다. 몰베노 Molveno 호수다.
잠시 졸던 이모는 문득 앞을 보고는 감탄을 내뱉으신다. 나는 전에도 몇번 놀러온 적이 있지만 오늘처럼 한 밤에 호수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다. 멀리서 보는 마을은 조명 빛이 총총히 켜져있는데 앞 호수에 그 불빛이 반사되어 마치 마을이 물위에 떠 있는 환상같아 보인다. 흐드러지게 아름답다는 표현이 이럴 때 나오는 구나 싶다. 물결에 잠잠히 흔들리는 마을이 한편의 작품같다.
이모는 한번 더 보고싶다며 차를 되돌려 잠깐 멈추자고 하신다.
하늘의 별들이 모두 내려와 마을 앞 호수에 박혀있는 것만 같다. 이모부도 눈을 뜨시고선 야경에 감동하신 것 같다. 두분은 내일 아침에 볼 호수도 기대 된다며 흔들리는 물빛을 바라보신다.
오늘 묵을 숙소는 몰베노 Molveno 마을에 바로 위치해 있었다. 밤 11시가 되어가는 시간에 도착했는데 스무살 후반정도 되보이는 숙소 주인의 아들이 친절히 맞아주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잔건지 얼굴이 피로해 보였다.
그는 '매년 8월에는 항상 이래요, 낮에 잠깐 눈을 붙이는게 다니까 자는 시간이 적긴하죠. 가족 중에 제가 주로 밤새는 역할을 맡거든요. 한창 성수기에는 일이 많으니까요' 라며 익숙한 생활이라는 듯이 말한다.
밖에서 봐도 호텔은 방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데 가족 모두가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모양이다. '식당은 닫았지만 음료는 제가 준비할 수 있는데 마실거라도 드릴까요?' 라며 그가 배려있게 물어봐준다. 감사하지만 이모부부는 크게 사양하시며 방 안내를 부탁했다. 호숫가 전망인 방은 두분께 드리고 나는 산 전망이 보이는 방에 묵기로 한다.
두분이 먼저 방에 들어가시고 나는 주인장 아들에게 내일 일정 관련해서 조언을 얻을 참으로 몇가지 물어본다. 이모부가 하이킹을 해서 몰베노에 있는 돌로미티쪽을 올라가보고 싶어하셨기에 걸어갈만한 거린지 걱정하던 참이다. 귀찮게 하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는 어차피 오늘 밤새 로비를 봐야하기 때문인지 컴퓨터 화면까지 틀어주면서 이것저것 자세하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케이블카 타고 뷰 보는데 말하는 거라면 중간부터 길이 가파라질 거라 시간여유 두고 천천히 올라가는 거라면 모를까, 힘들지 않으실까요'
음, 하이킹을 잔뜩 기대하시고 계신 이모부께는 내일 설득해서 케이블카를 타는게 나을 것 같다.
내일도 일정이 꽉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