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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완벽한 하루의 맥주

04.이탈리아 일주일 기행 Ortisei - Merano

by 벌꿀

한여름, 이탈리아 자동차여행 #03

60대 후반 부부와 이탈리아 붙박이 조카의 한여름 이탈리아 여행



04. 이탈리아 일주일 기행 Ortisei - Merano





체크아웃


핸드폰을 보니 아침 7시10분쯤이다. 맑은 공기 탓인지 푹 잔거 같은데도 일찍 눈이 떠진다. 매일 이동을 하다보니 짐을 가져오기는 했는데 열어서 옷만 갈아 입어 짐을 풀고 할 것도 없다. 오늘도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산속의 물소리가 더 청명하게 울리는 것 같다. 누워서 오늘 동선을 확인해본다.


9시에 조식먹는 곳으로 내려가니 아직 두분은 내려오지 않으셨다. 다들 부지런히 빈접시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접시를 채우고 있었다. 어제 묵은 숙소보다 조식은 더 다양해 보였다. 아침식사로 토마토와 오이같은 생야채까지 놓여져 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접시를 들고 단빵들을 탐색해 나섰다. 초콜릿 머핀도 있다. 빵바구니에 이것저것 담고 있는 찰나에 이모부부가 오셨다. 두분은 오늘도 계란을 드시고 나는 작은 빵을 반으로 잘라 버터와 꿀을 발라 크게 한입 베어문다. 로마에 가면 이 빵이 그리울 것이다. 입안을 가득 채워주는 거친 식감은 로마에서 먹는 부스러기 같은 빵의 식감과는 종류가 다르다.


작년 봄쯤인가에 나는 이 지역에 놀러와서 마지막날 빵을 한아름 사서 로마에 돌아가기도 했다. 그때는 누군가의 소개로 치즈와 스펙 (Speck* 이 지역에서 만드는 훈제 염장햄)을 직접 만들어 파는 조그만 가게에 들려 구입해 로마에 있는 이웃 몇몇과 나눠먹었다. 이번에는 다음 일정들이 있어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리는 빵과 커피얘기를 잔뜩 하고 나서야 오늘 일정을 위해 나섰다.





오르티세이 Ortisei 와 종소리와 스트루델 Strudel


이모부는 돌로미티로 여행지를 정하셨을 때, 이곳저곳 다 가보고 싶어하셨다. 그러다가 점점 장소가 늘어나면서 시간상 한두군데로 줄여야 했다. 그래서 나름 유명한 오르티세이 Ortisei 에서 알페 디 시우시 Alpe di Siusi 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산 위로 올라가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 될 것이다. 도로는 다행히 막히지 않았으나 산길을 둘러가려니 시간소요가 상당하다.


오르티세이 Ortisei 도 몰베노 Molveno 처럼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라기 보다는 호텔과 숙박시설로 가득한 곳이다. 마을의 시내 자체를 구경할 만한 것은 딱히 없다. 케이블카 밑으로 주차안내원이 근무하는 주차장이 있다. 줄을 설 정도는 아니였지만 케이블카를 타려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케이블카는 생각보다 한참 올라간다. 몰베노에서 탔던 것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는 것 같다. 밑을 보니 손가락 마디가 서늘해지는게 공포감이 몰려온다. 멋모르고 타는 아이들은 놀라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산위의 풍경


산위에는 당장 달려가고 싶어지는 초원이 펼쳐져있다. 아쉽지만 산봉우리들이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 날씨다. 분명히 해가 떠있어서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흥건하게 더운데도 바위 꼭대기 위의 사정은 다른가보다. 회색구름이 하늘 여기저기를 휘저으며 다닌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이라 쌀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그늘도 없는 땡볕이라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뜨거운 여름이 돌로미티에도 매년 찾아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모부의 지휘아래 정처없이 걷기로 했다. 산을 타는 하이킹이라기 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 산책로에 가까웠지만 이모부는 기뻐하셨다.


암벽등반을 해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돌부리에 손과 발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서로를 의지해 어디가 끝점인지 알지 못한 채 견뎌내는 일은 위대해 보인다. 단단해 보이는 바위를 깨고 줄을 타는 것이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 사람들은 이 산을 저렇게 넘어왔을까. 이탈리아는 이 거대한 산맥에 의해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초원에 경사가 진 곳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목에 작은 종을 걸고 있는 소들은 움직일 때 마다 댕글댕글댕 종소리가 난다. 이 소들이 목에 걸고 있는 종은 이탈리아에서는 캄파나치쵸 Campanaccio 라고 하는데 내가 처음 돌로미티에 왔을 때, 기념품으로 잔뜩 사간 기억이 있다.

걸을 수록 행복해진다. 앞에 보이는 암벽들에서 운이 좋다면 산양을 볼 수 있다. 산양들은 춤추듯 가볍게 암벽을 타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진다.


길 어디쯤에 닿으니 산장이 있다. 시간이 벌써 오후 3시가 되간다. 우리는 산장에서 맥주를 점심으로 하기로 했다. 이모부는 한껏 즐거워하셨고 나는 기분좋게 스트루델 Strudel 을 주문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산장 밖 테라스에 자리잡고 있는 손님은 우리뿐이였다. 나무로 된 길다란 테이블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앞과 옆을 바라본다.


산위의 날씨는 예측이 어렵다


스트루델 Strudel 은 오스트리아 음식으로 유명한 네모난 퍼프 페이스트리에 자른 사과와 건포도, 계피를 넣고 김밥 말듯 돌돌 말아서 구워내 잘라먹는 디저트다. 산악지역처럼 살짝 투박하고 한번에 크게 만들어 여럿이서 나눠먹는 형태의 음식이다. 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에 가깝고 사과로 유명한 이 지역에서는 대부분 어디서나 쉽게 메뉴에서 볼 수 있다. 안에 넣는 것은 집집마다 취향껏 재료를 바꾸기도 한다. 난이도가 높은 요리법은 아니지만 요리란 것이 또 맛있게 만들기는 까다로운 법이다.


이모부와 이모는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키시며 스트루델을 맛보신다. 땀이 송글송글 나게 걸으셨으니 당 보충이 필요하실 것이다. 오늘 점심은 간단히 때우게 됐다. 두분이 즐겁게 서로 건배하시는 모습을 보니 누군가를 깊게 아끼며 살아가는 삶은 그것만으로 최고의 삶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케이블카가 6시에 닫는다고 하니 돌아온 길을 다시 서둘러 돌아간다. 오면서 봤던 소들이 보이지 않는다. 들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데 산 위의 자연은 마냥 봄처럼 여름을 기다리는 것 같다. 갑자기 먹구름이 급속도로 몰려온다. 아까 뜨겁게 비추던 햇살은 사라지고 금새 하늘이 어두워진다. 높은 곳의 날씨는 정말 알 수가 없다.


1.jpg 먹구름이 오기 전





사과마을 숙소


오늘 묵을 숙소는 메라노 Merano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잡아놓았다. 메라노 Merano 는 굉장히 매력적인 도시인데 두분이 피곤하시다고 하셔서 도시 구경은 스킵하고 숙소로 바로 가기로 한다. 숙소는 길쭉한 고양이 로고를 갖고 있는 곳인데 모던한 건물에 사과농장과 동물들도 키우고 있었다. 리셉션이 굉장히 독특하고 마음에 들었다. 품이 큰 나무통을 안을 비워 로비 데스크처럼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해놨다. 길고 흰 수염을 가지신 주인장이 친절하게 맞이해준다. 알아듣기 어려운 이탈리아어로 건물에 대해 설명해주시며 방까지 안내해주셨다. 숙소 내부는 굉장히 현대적이였다.


호텔 테라스에는 여러가지 운동기구들도 있고 전망 자체가 좋았다. 포도밭과 사과밭이 붉고 뾰족한 지붕들 사이에 틈틈히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공간은 아침식사를 하는 곳이였는데 통유리로 된 창으로 산과 마을이 한눈에 보이게 해놨다.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



3.jpg 메라노 Merano 근처 작은 마을 숙소에서 본 풍경



두분은 아까 산위에서 햇볕을 많이 쐬어 피곤하신 모양이다. 잠시 숙소에서 쉬었다 저녁은 주인장이 걸어서 갈만한 곳을 몇군데 추천해줘 그 중에 한 곳을 가기로 한다. 나는 숙소를 좀 즐겨보기로 한다. 0층 로비 옆에는 휴식 공간처럼 스낵 자판기가 있는 곳도 있고 숙소 바깥으로는 바로 사과밭이 있다. 동물들도 키우는 것 같은데 오후라 그런지 밖에는 안보인다.


사과밭이 가득한게 사과꽃 필쯤에 오면 달콤한 향과 흰색의 작은 꽃잎들이 눈처럼 피어오를 것 같다. 그때 오면 참 좋겠다. 가을에는 수확하는 사과를 판매하는 모양이다. 꿀도 종류별로 판매를 하고 있다. 여행 기념으로 꿀을 가져가야겠다. 하루에 한 숟갈씩 먹으면 그래도 꽤나 오래두고 먹지 싶다. 나는 여행기념품으로 그래도 한동안 일상에서 먹거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고르는 편이다. 과자나 술 같은 경우는 한번 뜯어서 호딱 한번에 먹어버리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늘어트리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안먹고 바라만 보고 있기에는 나는 급한 성격이다. 지난번 이 지역에 와서는 식초를 구입해갔다. 사과식초와 이름모를 허브를 넣은 식초 두병을 구입해 일상에서 나름 오랜시간 여행의 순간들을 추억했다. 여행에서 구입하는 기념품들은 낯선 곳에서 만났던 나를 일상에서 들여다보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꿀로 정했다. 사과는 가을에 나오니 아쉽다.


이모는 여행와서 보고 즐기는 것도 다 그 때여서 좋은거라며 한국에서도 잘 먹을일이 없는 꿀은 사가봤자 짐만되신단다. 나와는 다르게 이모는 여행의 낯선곳에서도 자신의 모습으로 계신 것만 같다. 나는 여전히 여행할때면 보통날에는 묻어왔던 감정들이 솓구치는 반면 이모는 유유히 삶을 이어서 그려내고 있는 것같다. 나는 묵직한 두통의 꿀을 양팔로 안고 이모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여름밤, 별빛들 아래서 마시는 맥주


5.jpg 마을 한켠에 위치해 있는 저녁식당


저녁은 주인장에게 추천받은 숙소에서 걸어서 갈만한 위치에 식당으로 예약을 했다. 식당은 뭐라고 발음해야할지 모르겠는 이름이다. Pfefferlechner. 마을이 작기는 하지만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가 없다. 가는길은 내리막 길이라 편한 발걸음으로 저녁 마실 나온 것 같다. 해가 넘어가고 있다. 식당은 맥주 양조장도 겸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나왔으니 오늘 저녁 만큼은 맥주를 양껏 마실 수 있다. 나무 사이사이로 놓인 테이블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신기하게 도로에 차도 없고 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식당은 항상 북적이고 있다. 스물 후반쯤 되보이는 금발의 남성 웨이터가 자리를 안내해준다. 이탈리아어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며 영어로 메뉴 설명을 해준다. 이모부는 옆 테이블의 가족들이 열심히 먹고 있는 등갈비를 주문하신다.


나는 송어구이와 크라우티 샐러드, 맥주는 추천을 부탁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나자 나무들 사이로 걸어둔 전구들의 빛이 총총히 더 진해지기 시작한다. 산속 마을의 식당에서 별빛 아래 불빛과 맥주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한 여름의 꿈만 같다. 이런 식당이라면 여름 내내 해가 질 쯤 저녁에 와서 맥주를 마시면서 계절을 보내고 싶어진다. 세상의 한 구석에서 그렇게 지내고 싶다.


송어구이는 생선 한마리를 통째로 구워서 냈고 겨자로 만든 소스에 섞은 삶은 감자와 딜소스가 곁들어 나왔다. 생선 껍질은 꽤나 두꺼웠는데 속살은 크리미하게 부드러웠다. 소스를 곁들이지 않아도 생선 자체가 훌륭한 맛이다. 다른 것 없이 생선만 그릴에 구운 것인데도 여름밤 이 식당의 분위기 탓인지 더할 것이 없다. 이집 크라우티도 일품이였다. 채썬 양배추에 오일이 코팅된 것처럼 맛이 부드럽고 시원했다. 나는 한접시 더 주문해 먹었다. 이모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맛을 보신다. 이모부의 등갈비는 프렌치프라이 감자칩과 같이 나왔다. 이 지역 음식들을 보니 예전 독일에 놀러갔던 기억이 난다며 그게 언제더라 하시며 껄껄 웃으신다. 맥주를 좋아하시는 이모부는 독일여행도 즐겁게 하셨을 것이다. 이래저래 잡담을 나누며 우리는 추천받은 밝은 색의 맥주로 잔을 부딪힌다. 역시 맛있다.


밤이 깊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식당 영업 종료시간까지 불빛아래 앉아서 반짝거리는 맥주잔을 채우고 싶었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에 다시 떠나야 하는 일정이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부는게 오늘 밤에 비가 올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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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저녁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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