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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도시에 가고 싶다

Bolzano - Verona - Fidenza

by 벌꿀

60대 후반 부부와 이탈리아 붙박이 조카의 한여름 이탈리아 여행



05. 이탈리아 일주일 기행 Bolzano - Verona - Fidenza





요란하던 밤


어제 밤사이 옆마을은 천둥이 요란하게 쳐댔다. 새벽 언제쯤인지 먹구름은 사라지고 오늘 아침 테라스를 나가니 어제보다 구름없이 비추고 있는 햇살에 하늘이 좋다.


9.jpg 천둥치던 밤


짐을 챙겨놓고 아침식사 전에 숙소 옥상 부근에 있는 테라스에 올라가본다. 당분간은 다시 오기 어려우니 보이는 풍경을 눈으로 한없이 담아본다. 그리울 것이다.


오늘 아침은 이모부부가 먼저 아침식사를 하시고 계셨다. 카푸치노와 계란에 요거트도 즐기신다. 어제부터 기대하던 통유리로 앞 전경이 보이는 뷰는 이제껏 묵은 숙소 중에 제일이다. 하루종일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공간이다. 봄에는 사과꽃을 보고, 여름에는 푸르른 산세를 즐기고 가을에는 노랗고 빨간 사과를 수확하고 겨울에는 흰 그림을 그려놓은 능선을 읽고. 그러다보면 삶은 금방 흘러흘러 갈 것같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시고 계시는 이모부부의 모습이 잘 그려놓은 그림처럼 보인다.


계란은 직접 자기가 원하는 타임만큼 익혀먹는 기계가 있었다. 영국식 Egg and soldiers 라고 알려진 계란요리는 계란을 반숙으로 삶아 수직으로 작은 컵같은 받침대에 놓고 계란 위쪽 껍질을 톡톡 깨뜨려 작은 스푼으로 먹거나 빵을 찍어먹으면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우오바 알라 코크 Uova alla coque 라고 부른다. 치즈나 계란을 아침식사로 소비하지 않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문화를 보면 아마 영국을 거쳐 프랑스에서 넘어온 요리법일 것이다. 어쨋거나 계란 노른자를 촉촉하게 먹으니 신선도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평소 로마에서는 전혀 먹을 일이 없는 아침메뉴지만 나는 어딘가 여행만 나오면 흡족하게 뭐든지 먹어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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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g Topper 에그 토퍼 커팅가위와 마음에 들었던 계란 받침대


계란을 익히는 기계 옆에는 계란 받침대와 계란 윗껍질을 자르는 도구가 놓여져 있었다. 받침대는 보통 조그마한 와인컵처럼 생겼는데 이집은 폭신해 보이는 쿠션모양의 돌로만든 것이 독특하다. 계란 껍질을 자르는 도구는 가위날 부분이 동그랗고 톱니바퀴처럼 이가 안쪽에 있어 가위질 하듯 사용한다. 가위날의 뾰족뾰족한 이가 계란 껍질에 박혀 계란의 윗부분만 도려낸다. 적절한 도구를 이런 세심한 곳까지 사용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로마의 어느 호텔에 가도 이런 도구를 내놓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약 220년전 괴테가 다녀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생활에서 기계나 도구를 사용하려는 문화가 다른 나라들보다 뒤쳐져있다. 이런 간단한 기구만 봐도 유럽에서 이탈리아가 참 고립된 문화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벽같은 큰 알프스 산맥 아래에 있는 이탈리아 중북부는 서로 쪼개져 다투고 경쟁하기 바빴지 산맥 윗쪽의 큰 대륙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작은 도시와 마을들로 나눠져 있으니 그 안에서 그 주변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를 작은 유럽이라고 부를만큼 이탈리아는 모든 유럽의 자연환경을 집약해놓은 것 같은 곳이다. 그런 자연환경이 문화와 역사적으로는 득도있지만 실도 많다.


내가 계란의 꼭지를 벗겨내는 도구에 빠져있는 동안 어제 방을 안내해주신 흰 수염의 주인장이 앞치마를 입고 일일이 아침을 먹고 있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묻는다. 산속 마을의 투박한 풍채지만 품위있고 편안한 표정이다.





도시구경


오늘은 볼차노 Bolzano 와 오후에 베로나 Verona 그리고 피덴짜 Fidenza 근처에 잡아둔 숙소에서 묵는 일정이다. 요 며칠 여러차례 볼차노 근처를 지나기만 했는데 드디어 도시 나들이다.


우리가 둘러보고 있는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Trentino-Alto Adige/Südtirol 주는 트렌토 Trento 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볼차노 Bolzano/Bozen 지역으로 또 나뉜다. 이탈리아가 20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설명도 있고 21개로 나눠져 있다는 설명도 있는 것은 이 지역 때문이다.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Trentino-Alto Adige/Südtirol 주의 행정적 주도는 종교개혁 역사의 무대였기도 한 트렌토 지만 막상 이 지역을 방문해보면 볼차노 가 훨씬 더 활기넘치는 실제 주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어 또한 트렌토 쪽은 아직 이탈리아어를 좀더 사용한다면 볼차노 는 아예 독일어권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이탈리아 본토와 다른 이 지역이 분리독립을 요구한다는 얘기들이 많지만 실제적으로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지역은 1차세계대전 중에 이탈리아에 속하게 됐지만 2차대전 중에는 독일편을 들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넘기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특별자치주로 남는 것을 제안해 지금까지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Trentino-Alto Adige/Südtirol 주는 자체적인 행정과 법률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대표적으로 본토 이탈리아 사람들이 불만사항으로 꼽는 세금에 관해 그렇다. 예를 들어 피렌체에 사는 사람이 세금을 내면 피렌체 시가 세금을 모아 도시가 사용할 어느정도의 퍼센테이지를 제외한 것을 로마 중앙정부에 보낸다. 중앙정부는 국가 전체적인 예산을 짜고 각 주와 도시들에 일정비율로 세금을 다시 돌려준다. 특별자치주인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Trentino-Alto Adige/Südtirol 주는 지역에서 걷어들인 세금의 90%를 자신들이 킵하고 10%를 중앙정부에 보낸다. 그러니 막상 이탈리아 정부에 내는 세금은 적고 중앙정부에서 받는 금액은 많아진다. 이런 이유로 이 지역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만드는데 더 많이 투자를 하고, 도로를 더욱 잘 정비하고 하는 등 경제적으로 여유있게 행정이 굴러간다. 물론 이 이점을 잘 활용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유능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같은 특별자치주인 시칠리아는 중앙정부에 내는 세금이 0% 지만 중앙정부로 받은 세금이 항상 모자라게 운영되며 실업률과 도시정비가 형편없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런 이유로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Trentino-Alto Adige/Südtirol 주 와 경계선에 있는 코르티나 담페초 Cortina d'Ampezzo 같은 마을들에서 행정소속을 변경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정부에서 항상 거절답변을 내고 있다.


이탈리아는 마치 예술을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를 표현해놓은 것처럼 곳곳이 아름답고 풍요롭고 눈부시지만 그만큼 역사와 문화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다양하고 복잡하다.


444.jpg 볼차노 도시구경 중


볼차노 도시는 한눈에 봐도 깔끔하고 여름에 봐도 차가운 인상이다. 햇살이 얼마나 좋은지 구름없이 하늘이 맑다. 시내 번화가 길 바로 밖에 주차를 한다. 평지로 내려와서 그런지 땀이 금방난다. 길거리와 가게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오전인데 다들 부지런히 나온 모양이다. 광장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제각기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고, 뛰어다니고, 구경을 하며 좋은 날을 즐기고 있었다. 이모도 오랜만에 도시다운 느낌이 좋으신 모양이다. 두오모 광장에 가로수로 심어놓은 나무들을 보며 이모는 감탄을 하시는데 구김살 없는 소녀같이 좋아하신다.


광장을 지나 이어지는 길에는 아침에 열린 시장도 있었다. 시장은 갖가지 채소와 과일부터 먹거리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올 적마다 이 곳에서 얼굴만큼 큼직한 브레첼 Brezel (Bretzel, Pretzel) 빵을 구입한다. 하트모양의 매듭이 지어진 큼지막한 브레첼 세개를 구입하자 이모는 점심은 그것만 먹어도 충분할 것 같다고 하신다. 과일도 몇개 구입한다. 여름이라 달콤한 과일들이 지천이다. 우리는 색색의 복숭아를 종류별로 몇개 집는다. 씻어서 한입 크게 베어물 생각에 벌써 침이 고인다.



우리는 두오모 성당 내부를 보고 겉을 한바퀴 돌고서는 이어져 있는 거리들을 걷기 시작했다. 가게의 물건들도 구경하고 곳곳에 심어진 꽃구경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진다. 이모부는 이탈리아에 속해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도시가 너무 다른 분위기라며 모르는 길들을 열심히 다니신다.


예전 독일친구가 이 지역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얘기해 줬던게 생각난다. 친구는 티롤 Tirol 지역의 사람들은 고집이 쎄고 이상한 억양의 독일어를 사용하며 성격은 폐쇄적인 걸로 유명하다며 아마 산악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과 보수적인 태도들이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라고 언급했었다. 그에 비해 바다를 두고 사는 사람들은 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이지 않냐고 말이다. 이탈리아 전체를 놓고보면 친구의 말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 이탈리아는 참으로 어느 원칙에도 들어맞지 않는 특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다.


22.jpg 볼차노 Bolzano 시장골목




베로나에서의 추억


이제 이탈리아 본토로 내려가야한다. 더이상 독일어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베로나 Verona 로 향한다. 고속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날이 너무 화창해서 오히려 구름이 조금 껴주기를 바랬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햇살은 더 뜨겁게 끌어올랐다. 지중해 이탈리아에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다. 베로나 는 내가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때 이 근처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도시다. 그래서 로마보다 짧게 머물렀던 곳이지만 더 애착이 간다. 아마도 처음의 모든게 다 완벽하고 행복하고 환상적이였던 기억때문일 것이다.


이모부는 이제야 이탈리아 같은 느낌이 든다며 사실 본인은 이쪽 취향이라고 고백하신다. 붉으스름한 건물들과 어딘지 사람의 손길로 만든 것 같은 이런 도시가 정감이 간다고 말이다. 우리는 걸어서 도시 시내쪽으로 들어간다. 깔끔하게 정돈된 아레나 디 베로나 Arena di Verona 원형극장이 먼저 보인다. 여름에는 야외 오페라를 안에서 하는데 나는 십여년 전에 카르멘 Carmen 을 여기서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제일 저렴했던 좌석이라 집에서 방석을 챙겨가 딱딱했던 돌좌석에 앉아 더웠던 여름 밤에 먼 무대를 들려오는 음악으로 보던 생각이 난다. 자정넘어 끝나고서는 젤라또를 먹으면 집에 돌아갔다.


도시는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인데도 길거리는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8월인데 문을 닫은 상점이나 식당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모부는 강가쪽으로 가보고 싶어 하셨다. 잎이 넓은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놓아 강을 따라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물소리를 들으니 편안해진다. 걷다보니 폰테 디 카스텔베키오 Ponte di Castelvecchio 다리쪽으로 돌아왔다. 다리 위에는 햇살을 쬐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튼튼하고 견고한 다리와 성의 붉은 벽돌들은 도시로 이어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디든 색깔을 눈여겨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자신을 표현하고 표출하는데 굉장히 능하다. 예전부터 글을 남기고 이름을 새기고 문양을 만들고 색깔을 정해서 도시와 마을을 꾸몄다. 붉은 벽돌은 도시 곳곳에 한때 이곳을 통치하던 가문의 표시로 여전히 도시를 표현하고 있다.


이모부부는 베로나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관광을 충족시킬 유적지도 곳곳에 있고 동양인과 서양인 여행객들이 적당히 뒤섞여 있는게 심적으로 편해지신 걸지도 모른다. 너무 낯선 곳은 모르는 음식처럼 맛있게 먹기가 힘들 수도 있다.


이모는 테이블에 앉아서 주황색 칵테일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스프리츠 Spritz 라고 지금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근처에서 나는 프로세코 Prosecco 스파클링 와인에 캄빠리 Campari 나 아페롤 Aperol 를 넣고 클럽소다 탄산수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이다. 아페리티보 Aperitivo 라고 하는데 저녁식사전 5-6시쯤 이런 칵테일에 간단한 스낵을 곁들이는 것으로 이탈리아 북부 문화로 유명하다. 요즘엔 저녁식사 대용으로 하기도 한다. 이모부도 마침 맥주가 간절했는데 쉬어가자고 하신다. 광장 코너에 있는 가게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뜨겁게 떨어지는 햇빛을 바라보며 호로록 맥주와 칵테일을 마신다. 진한 주황색 음료의 향이 기포가 터질 때마다 퐁 퐁 더욱 진해지는 것만 같다.


향긋한 알콜향이 나자 예전 추억이 생각나는데, 이 지역을 포함한 이탈리아의 북동부 지역에는 로 스트로쇼 Lo struscio 라는 것이 있다. 스트루샤레 Strusciare 는 걸을 때 신발을 끌다, 치맛자락을 땅에 끌면서 걷다 할때처럼 질질 끄는것을 의미하는데 이쪽 지역에서는 젊은이들이 해가 좀 내려갈 쯤, 아페리티보 시간에 마을의 시내에 나와 한가게에서 술 한잔마시고 잠시 노닥거리다, 또 옆옆 다른 가게로 옮겨서 한잔마시고 얘기하다, 다시 그 앞 다른 가게로 옮겨서 한잔 마시고 하는. 이렇게 여기저기 한잔씩 가게를 옮겨다니며 마시는 문화가 있다. 이것을 로 스트로쇼 Lo struscio 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후에 시내에 가면 약속없이도 항상 아는 이들을 만나고 같이 가게를 옮겨다니며 여러잔을 마시고 어울리다 밤 언젠지 모르는 시간에 헤어진다. 로마에서는 볼 수 없는 문화다. 로마는 한 식당에서 저녁을 길게 먹는 문화다. 처음 이 지역에서 지낼때는 이게 무슨 낙인가 했는데, 로마에서 지내면서는 가끔 이 문화가 생각난다. 이 가게 저 가게 들리면서 천천히 한잔씩 마시며 길을 천천히 끌면서 다니는 이 지역의 이러한 술 문화는 여기에 와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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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베로나에서의 추억





평야에서 지내는 밤, Agriturismo 농가민박


우리는 목을 축이고 오늘 묵을 숙소가 있는 피덴짜 Fidenza 근처로 바로 가기로 한다. 오늘밤은 아그리투리즈모 Agriturismo 농가민박에 묵을 예정이다. 포 Po 강과 가까운 넓은 평야지역으로 풍경은 단조롭고 지루하나 산업적으로도 농업적으로도 풍부하고 여유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에밀리아 로마냐 Emilia-Romagna 주에 속해 있는데 에밀리아 Emilia 에 속한 지역과 로마냐 Romagna 에 속한 지역이 또 다르게 나눠져 있다고 보면 된다. 에밀리아 Emilia 에는 볼로냐, 파르마, 모데나 등이 로마냐 Romagna 에는 라벤나 Ravenna 와 리미니 Rimini 등이 속해있다.


베로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산세들이 보이지 않는 밋밋한 평원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멀리봐도 높은 산이 없는 풍경은 오히려 다른 세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굴곡도 없이 이어지는 도로는 지루하다. 집들은 넓은 땅에 간격을 넓혀 듬성듬성 있고 정원에는 과일나무들이 몇그루씩 심어져 있다. 도로의 끝을 계속 따라간다.


이모부는 옆에 파르마 Parma 에 들러보고 싶어했지만 이모가 피곤한 관계로 우리는 숙소에 우선 들어가기로 했다. 도로변에서 평야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니 붉은색의 성당처럼 보이는 큰 빌라가 나온다. 오늘 묵을 숙소다. 포도나무를 들어가는 길에 가로수처럼 낮게 심어놨다. 주변에 땅이 어마어마하다. 짙은 머리색의 코가 높고 뾰족한 이탈리아 여성분이 건물 안에 들어가자 맞이해준다. 숙소에서는 레스토랑도 같이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오늘 저녁에 큰 이벤트가 있는지 우리를 우두커니 서있게 하고서는 자기는 주방을 몇번이나 들락날락했다. 한참 후에서야 방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실내는 심플했다. 방키는 평범한 열쇠였고 녹색으로 칠해놓은 방은 투박했지만 깔끔했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구름도 없이 맑던 하늘이 해가 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흐려진다. 소나기가 올 것만 같이 먹구름이 쏜살같이 몰려들어 가득찬다. 낮에 너무 뜨거웠던 모양이다. 비가 갑자기 후두두둑 엄청난 양으로 쏟아진다. 비오기 전에 도착한 것이 다행이다.



오늘 저녁식사는 숙소에서 먹는 것으로 예약해놓았다. 이탈리아에 농가민박들은 식당을 겸하거나 숙소에 머무는 손님에 한해 식사를 제공하는 곳들이 많다. 숙소를 예약할 적에 Mezza pensione 메자 펜쇼네 라고 적혀 있으면 아침과 저녁식사를 포함하는 가격이고 Pensione completa 펜쇼네 콤플레타 는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모두 제공하는 옵션이다. 보통은 그 지역에서 먹는 음식들을 준비해주니 지역음식을 경험하기에도 좋은 기회이다.


끝없는 평야가 이어지는 이 지역은 농산물이 풍부하게 나오고 파스타를 말려서 오랫동안 저장해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바닷가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반죽을 해먹는 생파스타가 유명하다. 특히 볼로냐식 파스타 소스로 알려진 다진고기를 넣어 만든 볼로네제 라구 소스 Ragù alla bolognese 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요리법이다. 다만 본래 Ragù alla bolognese 라구 알라 볼로네제는 우리가 흔하게 떠올리는 토마토소스가 잔뜩 들어간 붉은소스가 아니다. 원래 라구 알라 볼로네제는 Ragù bianco, Bolognese bianca 이탈리아어로 bianco, bianca 비앙코, 비앙카 하얗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토마토로 새빨갛지 않다. 그리고 스파게티와 먹지 않는다.


또한 이 지역의 염장해서 말린 돼지고기들은 세계 미식가들의 침을 고이게 하며 꼭 먹어봐야할 음식리스트에 항상 오른다. 이 근처에서 만드는 파르미쟈노 치즈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치즈이며 대부분 이탈리아인들의 가정 냉장고에 항상 구비하고 있는 재료 중에 하나다. 지역마다 제각각인 이탈리아 사람들 대다수가 그래도 공통적으로 좋아할 만한 서너가지의 음식과 재료가 이 지역에서 나온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부근에 올 적마다 내가 그려내는 평야에 사는 이들의 모습은 활력이 넘치고 언제나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꼼꼼하고 씩씩하며 여유롭다. 밋밋하고 심심한 풍경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더욱더 창의적이고 활달한 습관을 가지게 되는 지도 모른다. 이 지역의 음식도 그래서 좀더 복잡하고 창조적이며 조화롭고 섬세하다.


저녁식사는 코스형태로 전채요리와 파스타, 메인요리와 디저트 그리고 와인을 곁들였다. 전채요리는 당연한 염장한 햄들과 치즈, 파스타는 리코타와 시금치로 속을 채운 생파스타인데 모양이 캬라멜 캔디처럼 양 옆을 꼬아놓아 보는 재미가 있다. 소스는 버터에 세이지향을 입혀 파스타에 버무려 놨는데 입에 착착 붙는 맛이 좋았다. 메인요리는 이모부는 송아지고기에 사과로 만든 소스를 곁들이는 것으로, 나와 이모는 파르미쟈노 가지 요리를 골랐다. 송아지고기는 살코기를 익혀 얇게 썰어 나왔는데 상상했던 것은 없었지만 이모부는 의아한 요리라고 표현하셨다. 가지요리는 짠맛이 있었지만 토마토소스와 모짜렐라치즈, 가지라는 익숙한 재료와 맛 덕분에 이모는 만족해하시며 드셨다. 음식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고 맛있었다. 와인은 추천받아 Gutturnio 를 한병 땄다. 로마에서는 쉽게 보지못한 와인인데 이번 기회에 맛을 본다.


비가 그치지 않고 밤늦게까지 쏟아질 모양이다.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에 튕기는 소리가 음악을 틀어놓은 것처럼 경쾌하다. 식당은 저녁모임이 크게 있는지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다. 우리는 긴 거리를 이동하느라 오랫동안 깊게 보지못한 것들이 아쉽다는 대화들을 나눈다. 디저트로는 젤라또와 크림종류를 골랐다.

요란한 빗소리와 시끌시끌한 저녁테이블이 재미있게 조화로워 보이는 밤이다. 내일 아침에는 비가 그쳐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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