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
다사다난 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담아내기 힘든 찬란했던 30대의 여정. 그중 가장 핫(!)한 마지막 1년
몇 문장으로 길었던, 요동쳤던 일년을 담아본다.
1월 어느날 오빠의 결혼전 마지막 출국날, 비행기 보딩 6시간을 앞두고 받은 프로포즈
사실 지난 2년여간 운명같은 사랑을 만나 아주 특별한 장거리 연애를 하며 앞으로 함께하는 삶이 당연하다고 몸으로 느껴왔던것도 같았다. 하지만 막상 프로포즈를 받으니 이제 진짜구나. 이거 현실이구나. 진짜 내 인생에도 반려자가 생기는구나 싶어 목놓아 엉엉, 한참을 울었다. 지난 청춘의 고난과 방황을 마치 오늘 눈물로 다 씻어 내겠다고 다짐이라도 한냥 말이다. 기쁨, 행복, 환희, (왜 이제서야 나타났냐는 듯한) 원망, 꾹꾹 눌러왔던 청춘의 상처를 치유받는 느낌 등등 살면서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을 느껴본적이 과연 있었던가
+프로포즈 날 받은 꽃은 1년이 된 지금도 단.한.송.이도 썩지않고 원상태 그대로 말라 장식중이다. 심지어 아직 향기도 나는데, 그날 사랑의 기운이 아주 엄청나서 이꽃이 아직도 건재하다고 우리끼리 말한다.
3월 폐차까지 하게된 엄마아빠의 교통사고
언니네 가족 전원 코로나 확진으로 결혼식 전날 격리해제
호사다마 라는 말은 누가 처음 지었는가. 30년도 넘게다니던 도로에서 신호정차중에 가만히 있는 차를 트럭이 와서 박았다고 한다. 세상 감사하게도 차량은 반파됐지만 연세도 있으신 부모님은 입원치료 한달정도로 마무리 되었다. 물론 일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여전히, 후유증 때문에 통원치료가 끝나지 않는다. 참 무서운 교통사고. 언니를 시작으로 잘 버티던 코로나를 결국 걸려버렸고, 형부, 조카까지 순차적으로 이어져서 무려 결혼식 전날 마지막 환자(?)의 격리해제가 되었다. 차암.. 드라마를 이렇게 쓰라고 해도 세상 작위적이라고 비웃을텐데ㅎㅎ 이 결혼이 아주 행복하고 좋은 일은 맞았나보다. 액땜을 제대로 했다.
코로나 시대 중 가장 높은 숫자인 일 70만명 확진을 기록하던 어느 4월, 운명같은 사랑과 결혼을 하였다.
가장 나다운 행사를 치루지 않았나 싶다. 이 세상 단 하나의 맞춤 드레스부터 화관 장식, 생화도 직접 골라 장식하고, 노래 선곡, 도입부, 식순, 메뉴, 식장의 장식할 꽃 종류와 갯수, 컬러까지 까다로운 내 입맛대로 골랐더니 나에게는 모든것이 완벽했다. 심지어 참으로 건방지게도 그날의 하객까지 내가 골랐다. 늙으막에 결혼하는데 이런것도 내맘대로 못하냐며 뭐 배째라 식이었다. 늘 생각하는거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 성격 희안해
+결혼식 후 남편은 다시 '진짜'마지막 출국을 했다. 다시 3개월의 롱디..
7월 드디어 돌아온 오빠와 귀국하자마자 떠난 태국휴가 첫날, 코로나 확진 되었다.
그것도 남편만. 당시는 음성확인서 없이 국내 입국이 안되었기 때문에 음성인 나만 바로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픈사람 혼자 남겨두고 오는 공항에서 또 잠시 생이별.. 한국에 돌아온 뒤 매일 pcr테스트 하며 나에게도 곧 찾아올 코로나를 기다렸지만 불행중 다행으로확진되지 않은채 지나갔고 우린 그렇게 일상에 복귀했다.
8월 생각보다 험난한 남편의 회사로 인한 주말부부 시작,롱디 어게인에 아버님의 췌장암 말기 비보
복귀한 부서가 경기도 모처에 위치하고, 출근시간이너무 이르다보니 서울서 함께 생활할 수가 없었다. 오빠는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 숙소를 제공받아 출퇴근을 했다. 새벽 6시까지 출근이기때문에 도저히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말부부, 그래 남들은 이 또한 축복받은 거라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여유를 부리는게 허락되진 않았다. 생각보다 적응하기 험난했던 적응 초기. 물리적인 환경, 시간, 업무스타일, 새로운 사람들 등등 모든게 너어무 와일드하다보니 무던한 사람에게도 혼돈의 카오스가 와버렸다. 출근한지 단 몇일사이에 눈빛이 불안해지고, 인상이 바뀌고, 목소리톤이 달라지니 보는 내가 불안하다 못해 너무 겁이나기 시작했다. 주말부부는 무슨, 평일에도 내가 회사 숙소로 내려가서 같이 지내고 새벽에 같이 출근을 했다. 잠깐 버틸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그렇게 2주정도 보낸 어느 주말, 아버님의 호출.
아주 이성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본인의 지난 한달간의 일들을 이야기 해주셨다. 단순한 불편함때문에 시작된 병원행에서 대학병원 검진으로 이어졌고 알고보니 암이라고 한다. 앞으로 어떤 검사를 더 받을거고 서울에 어떤 병원까지 가서 진료 받고자 한다. 등등 되려 듣는 우리를 안심시켜 주시려는 듯, 되려 우리를 위로해주시려는듯한 느낌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천천히 말씀 주셨다. 두사람 결혼 하고 이제서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시작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어 정말 미안하다고 하시며 말이다. 아.. 이게 무슨.. 이런 말씀을 하시게 하여 되려 내가 몸둘 바를 모르겠다. 가장 힘든것은 아버님 자신이실터인데.. 애써 미소 띄우며 제가 앞으로 아버님 옆에서 간호 잘 하고 도움되라고 이때에 맞춰 시집온것 같다 말씀드렸다.
여러 검사를 마친 8월의 마지막 날,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오셔서 최종 진단을 받으셨다. 간, 장기 심지어 뼈, 뇌 까지 퍼졌다고. 췌장암 4기 진단이 떨어졌다.
마음이 무너진다.
꾸역꾸역, 잘 버티고 있었는데 이정도 안건은 어떤 인내와 이성으로 버티기 힘든 종류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아니었다. 그렇자나도 너무나 불안했던 남편이 또 한번 강한 충격을 받아버린 듯 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옆에서 더 힘껏 힘을 내야했다. 그렇게 무너지고 할 시간도 없이 8월이 지나가고 있다.
9월 남편 회사 근처로 이사를 결정, 일주일만에 집계약을 했다.
아무것도 해결되는것 없이 보낼수는 없었다. 장거리연애에도 싸우지 않던 우리가 지금, 드디어 3년의 롱디를 청산하고 함께 하는 이 좋은 시기에 서로 너무 힘들어하며 싸우는 횟수가 늘어났고 심지어 나는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까지 들려했다. 정말 방법을 모르겠는데 일단 남편 옆에 함께 있어야겠다 싶었다. 이 문제의 본질은 우리의 사랑이나 마음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외부 요인으로 인한 우리의 위기였고 지금은 안정감이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이것부터 해보고 안되면 또 다른거. 하나씩 지워가며 해결해보자. 처음보다는 낫지만 불안함과 부정적인 에너지에 갇혀있던 남편이 집을 계약하고 나서는 눈빛이 조금 편해보였다. 내 기분탓이었을까.
바쁘게 지나 추석연휴가 되었다.
결혼 후 우리의 첫 명절. 남편이 복귀 후 처음으로 이틀이상 쉬어보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주변이 요동치는 것에 비해 당연한 이치이지만, 세상은 그냥 똑같이 굴러간다. 간만에 친정집에서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희안하게도 친정집에서 이틀이고 삼일이고 자고 오는걸 참 좋아하는 남편, 그 연휴 덕분이었을까 남편이 조금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10월 우리의 연애를 함께한 단칸방 생활 청산, 우리의 첫 전세집으로
결혼한 후에도, 싱글시절 혼자살던 오피스텔 단칸방(!)에서 당분갈 지낼 생각이었어서 혼수를 하지 않았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혼수를 장만하게 되었다. 한달간 끙끙대며 쇼핑을 마치고 10월말, 우리의 첫 신혼집으로 들어왔다.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면 오빠의 회사가 슬쩍 보이는 위치. 이것만으로도 남편은 마음이 편안해하는것 같았다. 회사 근처라고는 햇지만 6키로도 넘는 생각보다 먼 거리의 숙소, 노동자들의 거리, 시골에 난데없는 교통체증, 주차공간도 없어서 길거리에 대야하는 험블한 환경들도 꽤나 스트레스 였을 것.
몇번이고 집을 보러 왔었는데 그날은 그냥 지나만 가려던 참이었다. 운 좋게 쏙 마음에 드는 층수와 뷰, 그리고 단지를 찾았다. 몇개 안남았었는데 딱 이집이 마음에 훅 들어오는데 아,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그 나와 핏하는 집을 찾았을때 느낌이구나 싶더라. 그래 여기서, 이집에서 시작해보자. 왠지 모든게 다 잘될것만 같았다.
11월 이렇게 우리도 평범하고 깨끗하고 좋은집에서, 주말에는 함께 목욕탕가고 영화보고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는것 같았다.
오빠는 차분하고 온화하고 여유롭던,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와있었다. 날카로워졌던 인상과 말투는 어느새 사라졌고 늘 웃으며 집에 들어오고 때론 나보다 먼저 들어와 나를 반겨주었다. 웃고 장난치고 행복해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같은 표정으로. 이게 행복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12월 내가 사랑하는 계절, 회사가 내맘같지 않네
내 인생에 또 중요한 한가지, 청춘을 오롯이 갖다 바친 나의 일터 언제나 짝사랑 같은 나의 회사. 글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몰입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업환경이 험블해졌고 모두가 지치고 예민한 시기였다. 뭐라도 해야했고 성격의 재질상 이런 공기는 잘 참을수가 없다. 내 스스로 팀장님이랑 부딪치는 횟수가 늘었고 모든게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런건 연말의 바이브가 아닌데.. 화목했던 팀웤이 부서지는 느낌이 든다. 좋았던 사람들간 갖가지 오해들이 쌓이고 원망도 쌓인채로 이 좋은 시기를 흘려보낸다. 내가 사랑하는 12월, 겨울의 시작, 크리스마스, 그리고 내 생일. 모든게 즐겁지가 않더라. 그저 빨리 이 지긋지긋한 한해가 어서 지나가기를 바랄뿐. 어쩌면 이런게 아홉수라 일컷는 것인가 또 끼워맞춰질 정도로 이제 심신이 조금 지쳐버린 느낌이랄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
새해 1월.
정부는 정책을 바꿔 한살을 모두 깎아준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서른아홉에게는 와닿지 않을 것.
새해가 되었고 그저 한 일주일이 흘렀을 뿐인데 마치 많은게 변한듯한 기분이 들고 공기가 좀 다른 느낌이다. 혼란스러웠던 연말의 느낌은 사라지고 그저 조금 식어버린, 아니 차분해진 내가 있다.
어쩌면 나의 직전 1년은,
마흔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우리네 찬란한 30대의 집약체, 요약본이었던것일까.
잊지말라고. 끝이아니라 시작이니까 더 바싹 긴장하고 40대를 맞이하라고 세상이 던져주는 교본이자 미리보기 였던 것이었을까. 다르게 생각하면 마지막 방황이자 앓이 였던것 같기도 하다. 성인이 되기 전 십대 사춘기에 풍파를 겪어내 듯, 나는 중년으로 가는 길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철부지 젊은이의 마음과 현실의 내 생물학적 변화사이에서의 갈등은 아니었을까.
아직 많은 것들이 작년의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채 마흔이 되었지만
공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인생도 여전히 굴러간다.
다만 챕터가 바뀐채 굴러간다.
인생 2막, 지금부터라고 봐야겠지
앞으로는 마흔의 일기를 써보고자 한다.
그 일기에는 조금 더 담백하고
조금도 운치있는 이야기가
기록되길 바래본다.
지난 세월처럼 자극적인 스토리는
너무 뭐랄까. 음
작위적이랄까..ㅋ
다시말이지만 드라마라도 작위적이라고 욕하면서 봤을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