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슬픔을 차용한 제목들에 대하여
어떤 제목을 보고 불편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 제목이 말하려는 내용이 아니라
그 제목이 작동하는 방식이 거슬렸다.
“<>지만 <>는 하고 싶어.”
요즘 에세이 제목에서 자주 보이는 문장 구조다.
하나의 결핍을 앞에 두고,
사소한 욕망을 뒤에 붙이는 방식.
위기와 일상을 한 문장 안에 접어 넣는 공식.
그 문법이 문제라서가 아니다.
문제는 이 문법이 이미 한 번
너무 깊은 곳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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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지 않았다.
내용도 모른다.
다만 기사로 몇 가지 사실만 알았을 뿐이다.
굉장히 젊은 사람이었다는 것,
여성이었다는 것,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사망했다는 사실.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그 제목은 이미 하나의 사건이 되어 있었다.
유치해 보일 수 있는 구조였지만
이상하게 와 닿았다.
슬펐다.
그건 잘 쓴 문장이라서가 아니었다.
세련돼서도, 기획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 문장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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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었다.
그 여성은.
이 지점에서
나는 그 문장을
동세대의 공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도 그럴 수 있다”가 아니라
“저 나이에는 저 말밖에 남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왔다.
그건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젊다는 건
말을 다듬기 전에 감정이 먼저 도착한다는 뜻이고,
여성이라는 건
그 감정을
조금 가볍게, 조금 귀엽게,
혹은 스스로 낮춰 말하도록
오랫동안 훈련받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문장은
세련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끝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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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같은 문법의 제목들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톤, 취향, 기분,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하는 데
그 구조가 아무렇지 않게 쓰였다.
그 순간부터
이 문장은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미 한 번
젊은 생의 가장자리를 통과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제목은
말을 잘 만들었는데도 가볍게 느껴진다.
문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장이 통과하지 않은 깊이가 문제다.
위기의 언어를 빌려
취향의 서사에 얹는 순간,
그 말은 공감이 아니라 소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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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하지만” 뒤에 무엇이 오는지 궁금하지 않다.
앞에 놓인 감정이
정말로 그 말을 써도 될 만큼
삶을 통과했는지가 먼저 보일 뿐이다.
말은 아무나 쓸 수 있지만,
어떤 문장은
아무 때나 써서는 안 된다.
어떤 문장은
젊은 사람이 쓰면 슬픔이 되고,
더 오래 산 사람이 반복하면
장치가 된다.
요즘 에세이 제목들이 나를 피로하게 하는 이유는
감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감정의 무게를 구분하지 않아서다.
이미 한 번
슬픔으로 닫힌 문장을
다시 가볍게 여는 순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건 비판이 아니라
애도에 가까운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