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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도민 Sep 12. 2023

변화의 시작

2019년이 저물고, 2020년이 됐다.


지휘자 진솔과 함께 시각장애인을 위한 지휘 워크숍 커리큘럼 초안을 완성하고 시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한국에서의 첫 연주회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도 버즈비트를 사용한 연주회를 열었던 적이 있으나, 한국에서 “버즈비트 프로젝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하는 연주회는 아직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녀석이 왔다.     


암울했다.

모든 것은 다 멈췄다. 세상 전체가 멈췄으며, 여럿이 모이는 상황은 위험했다. 

사회 전체가 힘들었지만, 공연계는 특히 심했다. 비정기적 보수에 기댈 수밖에 없는 많은 예술가는 배달 알바를 시작했다. 공연만 멈췄던 건 아니었다. 연습 자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오케스트라의 경우 많은 인원이 모여야 하는데, 관악기는 마스크 착용도 불가능했으며, 오케스트라 규모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연습공간은 주로 지하에 있어 환기도 어려웠다.

다른 분야가 그랬듯, 공연계도 온라인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지휘자가 필요한 오케스트라의 경우 이조차 불가능했다. 지휘란 시각 신호이고, 이것을 실시간으로 온라인으로 전송하는 경우 아무리 빠른 속도의 인터넷 선을 사용해도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버즈비트를 사용하면 온라인에서도 지휘에 맞춰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놀면 뭐 하나. 팬데믹이어도 무언가 계속 일은 만들어봐야지.

그래서 프로젝트 <버즈비트 비대면 합주>를 기획했다.     


버즈비트는 지휘자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이것을 진동 신호로 변환, 연주자에게 전달한다. 만약 지휘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아니라, 변환된 진동만을 온라인으로 전송한다면 시차를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당시 서울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시행했던 지원사업 Art Must Go On에 선정됐었는데, 정액 지급됐던 예산으로는 위 아이디어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택도 없었다.     


살짝 방향을 틀었다.

우선 지휘자의 움직임을 진동으로 기록했다. 연주자 개개인이 각기 다른 시간대에 진동기록을 느끼며 연주한 것을 녹음했고, 이것을 하나로 합쳤다. 다행히 이 시도는 잘 구현됐다. 연주자, 특히 정안인 연주자의 경우 진동을 세밀하게 느끼기 어려웠으나, 시각장애 연주자는 쉽게 적응하고 녹음을 마쳤다.     

이 시도는 어찌 보면 멀티트랙 녹음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살짝 방향을 틀었던 건 현실적인 선택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원안이 성공했다면 온라인 합주에 있어 혁신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지금 이렇게 아쉬워해 봐야 부질없지만 말이다.     


다른 곳에서 이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하는 말이 있다. 

“실패했지만, 완전히 망했던 건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지휘를 ‘기록’한다는 개념을 시도한 첫 사례다. 이 개념은 나중에 다른 장르에서 다른 방식으로 또 활용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완전히 망했던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버즈비트가 본연의 방식에서 벗어난 형태로 사용됐던 첫 시도였기 때문이다.


예술이든 기술이든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사람이나 환경을 만나면 변화되기 마련인데, 버즈비트는 이때가 그 변화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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