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순례
걷기로 했다. 수도원을 향해. 2025년 9월, 유럽의 수도원을 찾아가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무엇보다 걸어서 가기로 했다. 수도원까지 차를 타고 가지는 않겠다. 적어도 10km 정도는 걸으리라. 멀찌감치서 차에서 내려 두세 시간은 걸어야 한다. 그래야 이 수도원 탐방에 ‘순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여행이나 기행과는 다른 의미를 찾고 싶었다.
수도원 가는 길은 ‘묵상의 길’이다.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걷는다. 수도 영성은 매혹적인 주제이다. 일찍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스승을 찾아 배우고 공부하고 자료를 모았다. 이제 그 영성의 발원지를 찾아가며 길 위에서 되새겨 보고 싶다. 터벅터벅 걸으며 바람결에 실려 오는 저 침묵의 말들에 귀 기울여 보리라.
이 길은 또한 ‘체험의 길’이다. 수도원을 관람이나 감상의 마음으로 찾고 싶지는 않았다. 수도원에 머물며 전례에 참여하고 수도승과 함께 기도하고 싶다. ‘손님의 집’이 있는 수도원이라면 기꺼이 묵으리라. 그럴 수 없다면 가까운 마을에 숙소를 정하고 수도원에서 넉넉한 시간을 보내리라. 천 년을 이어온 그 영성의 향기를 깊이 호흡하리라.
더불어 ‘정화의 길’이다. 이제 내 삶의 시계도 오후 6시를 넘겼다. 아직은 황홀한 노을빛이 남아 있으나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삶을 돌아보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해야 한다. 돌아보니 지난날의 허물과 죄업이 바닷가의 발자국처럼 따라오고 있다. 삿되고 헛된 욕망의 잔해들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까. 미워했던 사람, 상처를 준 이들에게 멀리서나마 용서와 화해를 청하고 싶다. 부대끼며 살았던 모든 인연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리라. 수도원의 텅 빈 성당에서 눈물로 씻어낸 맑은 영혼으로 새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끝내는 ‘희망의 길’이다. 2025년은 25년 주기의 정기 희년(Iubilaeum)이다. 바티칸은 이번 희년의 주제어로 ‘희망의 순례자들(Peregrinantes in Spem)’을 제시했다. 신앙은 결국 희망이다.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우리는 간절히 희망을 갈구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이 순례의 끝에서 희망을 만나고 싶다.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떨쳐낼 힘을 얻고, 길 위에서 희망을 노래하리라.
그리하여 이제 수도원으로 간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는 떨어져 있는 곳, 신을 향한 찬미와 기도로 하루를 사는 사람들, 금욕과 절제와 노동의 소박한 삶이 있는 곳, 그곳을 찾아간다. 고행으로 은총을 갈구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