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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Y Feb 28. 2024

친구가 생겼다

#12

2월 끝자락을 향해가는 즈음, 눈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로 오다가 우박이 되더니, 짙은 눈이 되었다.

습기 가득한 눈은 쌓이고 쌓여 한 뼘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왔다. 올해 어쩌면 마지막 눈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음날 눈은 모든 곳을 덮었고, 나무에는 무겁게 눈이 열려 겨우 무게를 버티듯 있었고, 바닥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이 광경을 지나치기에 아까웠다. 강원도 한지역처럼 눈이 온 곳에 쌓여있었다. 아름다웠다.


올해의 마지막 눈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점심시간 산책을 나갔다.

짧은 산책 후 회사의 뒷공터에 갔다. 거기엔 작은 텃밭과, 작은 야외 나무테이블 하나와 벤치가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 위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예전에 눈 왔을 때 누군가가 울라프 눈사람을 만들었던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불현듯 눈사람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눈에 습기가 많아 잘 뭉쳐졌다. 눈을 조금 모아 동그랗게 다지자 눈사람 몸이 되었고, 작게 눈을 뭉치자 금방 얼굴이 만들어졌다.

눈은 근처의 나뭇가지를 주서 잘라 붙였고, 코는 작은 돌멩이로 만들었다.

팔은 기다란 나뭇가지를 꽂았고,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하다 단풍잎을 머리에 꽂아주었다.

짜잔. 나의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거의 십 년 만에 만들어본 나의 눈사람.

테이블가운데 눈사람을 놓고, 뿌듯한 마음에 사진을 찍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는데도 오늘 내가 뭔가 해낸 거 같고 왠지 모를 즐거움이 가득했다.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가 정화된 느낌이었다.


오후 내내 날은 화창했고 날은 점점 따뜻해졌다.

다음날 난, 눈사람이 살아있을까 궁금했다.

'녹았을까 안 녹았을까? 바닥의 눈은 녹았으니 없어졌으려나? 그래도 반은 남아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공터 나무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내가 만든 눈사람과 다른 뭔가가 있어 보였다.

난 '그렇지 날이 따뜻했으니 녹아나보다'하며 다가갔는데,

눈사람이 두 개였다!!

내가 만든 눈사람과 같은 모양과 크기로 만들어 옆에 높아두었던 것이다.

새로운 눈사람의 머리에도 낙엽이 놓여있었고, 둘은 마주 보고 있었다.


두근거렸다.

순간 콘크리트 건물에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런 감동이...


'누구지?'

낮시간에 움직이기 자유로운 청소 여사님일까, 아니면 다른 파트의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전혀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아마 지난번 울라프눈사람을 만든 사람이리라 생각되었다. 아마 그도 자신 외에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반가움에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누군지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와 나는 이미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통하였구나.

눈 오는 날 눈사람에게도 친구가 생기고 나에게도 보이지 않는 친구가 생겼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건물의 사람들이 감성 있는 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낭만적이었다. 이건 영화 '접속'에서 느낄만한 감정 같았다.

요즘 사람들은 나 역시도 그렇고, 큰 크리트 회색 벽에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다. 하지만 기회가 될 때는 오색빛의 영혼이 튀어나오고, 같은 빛을 만나기도 하는 거 같다.


그렇게 오늘 누군지 모를 이의 따뜻함으로 눈사람은 외롭지 않게 친구를 만들 수 있었고, 나도 낭만에 잠시 젖으며 같은 빛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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