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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Y Apr 08. 2024

동백꽃 씨앗 심기

#23

두 달 전 즘 아직 한참 겨울이던 때, 동백꽃 씨앗 다섯 개를 받았다.

동백꽃 씨앗은 손가락 끝마디 정도의 크기에 밤처럼 딱딱한 갈색 반구 모양이었다. 동백꽃에 씨가 있을 거라도 생각도 못 했기에 난생처음 보는 동백꽃씨가 새끼 고양이처럼 앙증맞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봄에 심으면 된다는 한마디 조언을 듣고, 잘 보이는 곳에 씨앗을 두고 봄이 오길 기다렸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이 설렘을 주며, 심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딱딱한 데서 잎이 나오고 나무가 된다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심는다고 싹이 날까’하는 의구심이 더 컸다. 그래도 이중 하나는 나지 않을까 하는 반신반의의 기대로 봄을 기다렸다.


봄이 다가왔고 벚꽃이 만발한 날이었다. 다섯 개 중 두 개는 새로운 시작을 앞둔 친구에게 선물해서, 세 개의 씨앗이 남아있었다.

‘화분에 심을까? 아냐, 나무가 될 거니까 아예 밖에다 심는 게 좋겠어. 집 앞 공터에 심으면 자라는 걸 볼 수 있어 좋을 텐데, 아냐 전에 보니까 제초작업을 해서 잘릴 거 같아.’

어디에 심을지 고민하는데 설렘이 느껴졌다. 나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한 개는 집안 화분에 두 개는 밖에 심기로 했다.


집에 있던 황색 토분에 흙을 넣고 첫 번째 씨앗을 심었다. 흙 속에 꾹 넣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과정이 생각보다 간단해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작은 물통에 물을 담고 모종삽을 챙겨 나왔다. 하얀 강아지 털처럼 보송하게 핀 벚꽃을 구경하고, 예전에 보아두었던 장소로 향했다. 산 끝자락에 있던 도서관이었는데, 유리창 너머에 나무들이 조경되어 있어 마음에 들었더랬다. 가끔 이곳에 앉았을 때 동백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겨울에 핀 붉은 동백꽃을 다른 사람들도 볼 상상을 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까이 본 터에는 생각보다 자리가 좁았고, 다른 나무들과 건물에 가려 해가 잘 안들 거 같았다.

‘내가 보기 좋지만, 얘가 해를 못 받아선 안되지. 여기는 탈락’

나무는 한번 심기면 별일 없는 한평생 그 자리에서 살아야 하니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십일 간직하던 씨앗의 앞으로의 삶이 내 결정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니 책임감이 느껴졌다. 새로운 곳에 전학을 가는 아이가 텃세를 받아서 힘들어할까 걱정하는 학부모가 된 거도 같았다.

      

나는 좀 더 산 가까이로 향해 걸어갔다. 보도블록 인도 옆으로 아까보다 넓은 산비탈이 펼쳐졌고, 아까보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있었다. 곧 좋은 자리를 발견할 거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집을 보러 다니는 거처럼 태어나지 않은 동백나무를 위한 땅을 알아보았다.

‘햇빛은 잘 들까? 남향이 좋겠지? 사람들이 잘 밟지 않는 곳이 어딜까? 소음은 별로 없어 괜찮겠네. 나중에 자라서도 지내기 적당할까?’


‘가로등이 있으면 밤에 잠을 못 자니 패스. 여기는 너무 가팔라서 안돼. 패스. 여기는 공간은 괜찮은데 해가 잘 안들 거 같아. 패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생각보다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땅이 많은데 이 작은 씨앗 하나 심을 데가 없는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50m 즈음 걸었을까, 벤치 뒤에 비스듬한 경사로가 보였다. 가늘고 작은 목련 나무 네 그루와 크지 않은 단풍나무 사이에 적당한 공간이 있었다. 여름에도 다른 나무 때문에 볕을 가리지 않을 거 같았고, 나중에 동백나무로 크게 자라도 좋을 넓이였다.

‘이곳이면 괜찮겠다...!’


나는 삽을 꺼내 작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땅속에는 다른 나무들의 뿌리들 얼기설기 묻혀 있었다. 나는 구멍 주위에 흙을 살짝 흐트러뜨려, 뿌리와 잎이 조금은 쉬이 나올 수 있게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응원이었다. 구멍에 씨앗을 넣고 흙을 덮어준 후,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가져간 물을 뿌렸다.


야외의 첫 씨 심기를 무사히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씨앗을 심었던 곳 바닥에 낙엽이 많지 않았고 풀이 짧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그건 누군가 관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도 누군가 제초기를 써서 정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하지만 이미 씨앗은 심어졌다. 이제 그 아이의 운명은 그 아이의 것이었다. 무사히 그 아이가 자라기를 바라며,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난 집으로 돌아와 근처에서 마지막 씨앗을 심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1순위였던 집 앞의 아파트와 도로 사이에 있는 작은 녹지를 돌아보았다. 집에서도 볼 수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가 떨어져 있어 해를 가리지 않을 거 같고, 남향이라 볕도 잘 들 거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 여름에 잔디가 무성할 때 제초기로 풀들을 정리한 걸 목격했기에 소중한 동백이를 그런 불안한 상황 속에 놓아둘 수는 없었다. 승인된 것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선택지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패스.’


나는 집 뒤 야산으로 향했다.

‘그래, 산에는 사람의 손길이 적으니 잘릴 위험이 없겠지? 나무는 야생의 산에서 자라는 게 더 맞을지 몰라.’라는 생각에서였다.

등산로 입구를 향해 인도를 걷고 있는데, 순간 ‘나무를 심는 사람’ 책이 생각났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피폐해진 벌판에 한 사람이 수 십 년을 혼자 씨를 심으며 다녔는데, 그 덕에 마을은 다시 회복되어 생기가 넘치는 곳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나무 씨앗을 심으라 가는 내가 조금은 그 주인공이 된 듯했다. 묘목은 심기 어렵지만 씨앗이라면 이렇게 가끔 심으러 다녀도 좋겠다 싶었다.

  

평지를 지나 등산로를 타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에 올라갈 거라 생각하지 못해, 벨벳치마와 재킷을 입은 채였다. 산은 넓으니 좋은 곳이 눈에 잘 띄겠지 생각하며 걸었다. 집 앞에서 출발한 지 40분이 훨씬 지났고, 오랜만에 오르는 산은 가팔라 숨이 찼다. 목이 말랐고, 씨앗을 위해 준비한 물로 입술을 축였다.


산은 레드오션이었다. 수많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은 좁고, 얼마 전에 심은 듯한 나무들이 그나마 있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산책길 너무 가까이는 발길이 닿으니 안되고, 산책길을 조금 벗어나면 경사가 가팔라 심을 수 없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이었는데, 정상 하나를 오를 때까지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숨이 차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오늘이 아니면 봄을 너무 많이 지나서 안될 거 같았다.

다음 봉우리를 향해 30m 정도를 걸었을 즘, 등산로 옆에 작은 공간이 눈에 띄었다. 나무와의 간격도 다른 곳에 비해 여유 있는 편이었다.

‘여기다.’

나는 몇 발자국 들어가 가득 쌓인 낙엽을 치우고, 마지막 씨앗을 위한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산의 흙은 양분이 많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고, 촉촉했다. 역시 산이구나 싶었고, 좋은 장소를 발견해 기뻤다. 씨앗을 심고 흙을 덮은 후 물을 주었다. 그리고 볕과 비가 잘 닿을 수 있게 주변의 낙엽을 치워놓았다.

그렇게 나는 성공적으로 세 번째 동백꽃 씨앗 심기를 마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오랫동안 갖고 있던 숙제를 해결한 거 같았다.


각각 다른 장소에 세 개의 동백씨앗을 심었다.

하나는 집안 화분에, 하나는 사람이 손길 곁의 녹지에, 하나는 산속에.

씨앗이 발아할지, 한다면 어떤 씨앗이 발아할지, 그리고 나무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집안의 씨앗은 안전하기에 물을 주면 잘 자랄 수 있을 테지만 잘 키울 수 있을지가 관건이고, 바깥의 씨앗들은 자연이 잘 키워줄 것이라 든든하지만 사람이 해칠 것이 걱정이다. 나름대로 좋은 곳이라 생각해 심었지만,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인 거 같다. 하지만 씨앗들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니, 모든 씨앗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되어 동백나무로 잘 살아가길, 산에 새로운 바람을 만들어 주기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으며 오래도록 살아가기를.

   

언젠가 몇 년 후 동백나무가 잘 자라 붉게 꽃 피울 날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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