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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JANG Nov 06. 2019

Art on snow

어느덧 겨울이 되었고 한 해가 저물어간다. 한파가 들이닥치고 지역 곳곳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리기도 했다. 내가 있는 서울에서도 엄청난 추위와 함께 첫눈이 내렸었는데, 일정에 치이다 밖으로 나갔을 때는 첫눈에 대한 낭만적 감상은 느낄새도 없이 새하얀 눈밭은 온데간데없고 회색 구정물로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외진 주택가에 위치해 있는 덕에 귀갓길에나마 하얗고 소복이 쌓인 첫눈의 모습을 감상할 수가있었다.

<Untitled>(2000)

나는 계절 중에 겨울을 가장 좋아하는데, 살짝 몸에 긴장감이 드는 알싸한 추위가 좋기도 하고, 그러면서 가끔 내리는 하얀 눈은 내가 느끼는 추위와는 반대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눈이 내려 하얗고 소복이 쌓인 모습을 볼 때면 괜스레 그 위에 내 발자국을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개념미술가 루돌프 슈팅겔은 마치 첫눈이 내린 대지 위에 새하얀 발자국이 찍힌 모습을 연상케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사실 그 작품은 흰색 스티로폼 위에 래커 칠을 한 신발을 신고 올라가 그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녀 화학 작용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스티로폼이 녹아서 생긴 흔적이다.

<Untitled>(2009)

루돌프 슈팅겔은 작가와 관객의 관계, 작품의 생산방식과 그 과정에 대해 주목했는데, 작가는 종종 자신의 창작 과정에 관객들이 개입하기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며, 관객들이 남기고 간 물리적인 흔적들을 베이스로 많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대부분의 작품 제목들이 ‘Untitled’라는 것을 보면 작품을 이루는 근간은 관객들이 만들어낸 우연한 흔적들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느낄 수가 있다. 슈팅겔은 여러 가지 창작활동을 통해 본인이 미술작가로써 미술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문과 회의들을 끊임없이 표출해냈는데, 1989년도에 자신이 제작한 ‘instructions’라는 아트워크북에는 자신이 작품을 제작하는 모든 과정들을 사진과 함께 낱낱이 기록해 두었고, 작가는 이를 통해 미술계에 만연해 있는 지나친 낭만주의와 허세를 지양하고 예술에 대한 현실적인 자각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Untitled>(2002)

작가는 미술계에서 본인이 느끼는 이런 의문들을 비꼬고 타파하기 위한 노력들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여줬는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관객들에게 낙서와 같은 물리적 흔적들을 스티로폼에 마음껏 남기도록 한 뒤, 이후에 충분한 흔적이 남겨지면 그 위를 금속공예기법 중 하나인 ‘전해 주조(Electroforming)’방식을 통해 금과 아연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금속 재질을 코팅하여 입혀낸 작업물들을 제작했다. 이를 통해 탄생한 작품은 관객과 작가의 협력으로 태어난 공공 창작물이 되며, 관객이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대부분의 물리적 작업을 도맡아 했고 작가는 개념적인 측면으로만 존재하게 된다.이때 작품을 만들어낸 진정한 주체를 누구로 봐야 할까? 슈팅겔의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작가가 되기도 하고 다시 관객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며, 작가와 관객의 경계란 어디에 있는지 또 그 경계라는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발생한다.

개념미술이라는 것이 이제는 많이 익숙해지고 관객을 창작활동에 개입시키는 등의 시도도 흔해졌지만 그 당시 슈팅겔의 시도는 참신하고 도전적인 시도였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작가는 새하얀 스티로폼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순간에도 자신의 행위를 당시 미술계에 대한 회의가 담긴 파괴적 퍼포먼스로 여기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늘 회의를 가지고 살며 의문을 가지고 산다는 건 예술가가 가져야 할 당연한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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