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정리] 감정을 숨기는 것에 관하여.

타인을 위한 숨김과 자신을 위한 노출

by 페릴러

감정은 소통을 위해 ‘표현되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다. 표현이 잘 돼서 소통이 잘 될수록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런 감정을 표출하고 교류하는 것이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본능이기 마련이다. 꾸밈없이 표출되는 것이 본래 감정의 특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추가적인 사고를 하는, 즉 이성이 있는 인간은 이러한 감정의 표출마저 통제한다. 그리고 감정을 억제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나의 감성을 억제하는 것이므로 감정을 표출하기보다 더 어렵다.


감정의 표출은 말, 글, 행동, 표정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어떻게 제어하냐에 따라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도 다르다. 그저 말과 표정에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표출되는 것, 숨기려 하지만 드러나는 것, 일부러 감정을 표현하는 것, 과한 표현으로 감정을 과장하는 것 등. 이렇게 감정 표출 방식이 다양한 이유는, 어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긍정적이라면 문제가 없을 수 있겠지만, 보통 밝음으로부터 먼 감정들은 타인에게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감정 표출의 통제는 미덕의 영역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숨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흔히 약점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런 것 같다. 즐거움을 잘 표현하면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감정들을 잘 표현하면 예민한 사람, 민감한 사람이 된다. 슬프다고 슬퍼하면 울보가 되며, 화가 나는 상황에서 화를 내면 성질 나쁜 사람이 된다. 그래서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것은 나약함으로 취급된다. 더 나아가 잘못된 사람들을 만나면 이 감정들이 이용당하기도 한다.


감정을 숨기는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밝은 에너지는 타인까지 밝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에너지는 타인에게까지 그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슬픔을 나누면 잠시나마 그 사람에게 이 슬픔이 전이되며, 분노는 때론 당혹감을 주기도 한다. 더욱이 이 감정이 향하는 대상이 앞에 있는 상대일 경우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에서는 감정 표출이 타인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해한 사람이고 싶어서 우리의 감정들을 종종 외면하곤 한다.


어떤 감정들을 밝히지 않는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때에 따라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상황에 관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어떤 낙인 등을 찍기 쉽다. 측은하다, 불쌍하다 등. 흔한 예시로, 겉보기에 낙천적인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은 애초에 어떤 사건을 겪기 전부터 낙천적이고 밝은 사람이었으나, 삶의 어느 한순간에 어떤 비극을 겪게 된다. 그런 비극을 잠시 잊고 이전의 밝음을 표출한다. 그러나 그 사건을 타인에게 설명하는 순간부터, 이 사람은 그냥 밝은 사람이 아니라 그 비극을 잊기 위해 밝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때도 있으며, 불쌍한 사람 취급을 하며 이 사람에게 일종의 낙인을 찍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는 보지 않고, 그가 겪은 상황을 보며, 그가 지닌 밝음이라는 가치는 평가절하된다. 이런 부류의 낙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감정을 숨기는 때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감정을 숨기는 이유는 보통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타인이 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즉,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물론, 타인에 대한 의식이 꼭 감정의 숨김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서 감정을 표출할 때도 있는데, 이는 상대에게 공감할 때다. 우리에게 가까운 상대의 기쁨과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마주하면, 자신을 그 사람의 입장에 대입하여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공감하게 된다. 이를 받는 대상은 일종의 위안을 얻게 되며, 서로 연결된 것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준다.


그러나, 모든 것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을 위한 감정은 무엇이 남을까. 타인을 위한 감정만 표출하고, 자신을 위한 감정은 억제해야 하나? 감정을 쌓고 쌓을수록 마음엔 병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터지면 더욱 큰 감정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슬픔은 한이 되어 서리며, 화는 분노가 되어 폭발한다. 그렇기에 보통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심화하기 전에 해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의 주된 요지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풀어두는 이유는 대개 자신을 위해서이다. 억제하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비교적 편안한 상황이 된다. 이러한 감정의 배출과 해소는, 단순한 해소일 경우도 있지만, 내 감정과 상황들을 이해받고, 더 나아가 공감을 받기 위해서지 않나 싶다.


타인을 위해 감정을 숨기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화된 행동일 수 있으며, 타인에게 어떤 부담을 주거나 낙인이 찍히고 싶지 않아서일 수 있다. 그러나 숨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대화 등의 교류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누구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해서 해소할 수 있는 상황이 필요하다.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각 상황과 대상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감정과 이야기도 다르다.


그러기에 나에겐 주로 글이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내가 과거에 종종 글을 썼던 이유는 주로 이러한 감정을 배출하기 위해서였으며, 대표적인 예시 글이 나의 다른 매거진인 [슬픔의 단상]에 적어놓은 글들이다. 글을 작성하는 것이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감정과 이로 인해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생각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풀어낼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글은 나의 감정을 정제된 언어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번의 기록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는 왜 감정을 숨기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서 정리하기 위해 작성해 보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내가 어떤 감정을 마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작성해 보겠다.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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