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정리] 30대 중반에 몰려드는 건강에 대한 생각

건강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by 페릴러

운동 탓인지 아니면 잘못된 자세로 잠을 자서 그런지, 왼쪽 견갑골 부근에서부터 목, 가슴까지 연결된 근육에 담이 걸렸다. 이 때문에 한동안 목을 돌리는 게 잘 되지 않았다. 소화력도 뭔가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끔 과식하고 바로 자서인지 역류성 후두염이 생겼고, 이로 인해 연구개가 약해져서인지 종종 침만 삼켜도 사레가 들릴 때가 있다. 게다가 강도 높은 운동을 하고 오거나 피곤한 채 출근하면 빛을 보지 않아도 한 번씩 빛의 잔상 같은 것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릴 때도 있다. 전에는 겪지 않았던 편두통 때문이란다. 보통은 금세 회복하지만 이런 증상이 반복되면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더 어렸을 때 이런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망쳐놓은 허리를 기껏 운동으로 잘 잡아놨는데, 몸의 다른 곳들이 종종 말썽이다. 삼십 대 중반, 아직 젊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러는 걸 보니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예전 같지는 않다는 말이 조금씩 실감 나기 시작했다. 34살, 60살, 78살. 인간이 급진적으로 늙는 세 가지 나이란다. 외국 연구 결과이니 만 나이일 테고 이번 연도에 생일이 지나면 나는 34살이다. 나는 결혼도 하기 전에 이렇게 늙어버리는 것인가.


생로병사. 태어나서 늙어가며 그로 인해 병들고 죽는 자연의 이치. 사고사로 죽지 않는 이상은 나는 점점 늙어가고 있고 병을 얻게 될 것이며 언젠가 장애를 겪게 될 것이다. 자연의 이치라지만 두렵다. 그래서 종종 생각한다. 적어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까지는 건강하게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건강한 몸으로 단명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어울리는 삶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어릴 때부터 항상 건강한 편에 속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체격이 건장한 편인데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적도 없다. 감기 같은 잔병치레를 더러 하기는 한다만,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이내 회복하는 편이다. 물론 입원한 적도 없다. 그런데 그런 건강함을 믿어서인가 행동이 부주의할 때가 있고, 그러다가 손가락이나 발목 같은 곳을 조금이라도 다치면 굉장히 불편하다. 그러다 보면 새삼 나의 건강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고, 감사하게 되기도 한다. 곧 회복되는 상처들도 이렇게 불편한데, 이런 것들이 영구적이라면 얼마나 더 불편할까.


이따금씩 장애가 있게 되는 나를 상상한다. 내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더는 걷지 못하게 된다면, 스스로 숨을 쉴 수 없게 된다면,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아니 나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있을까. 나에게 이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음 자체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의 삶에 대한 큰 미련도 없다. 다만, 내가 병들고 아프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울까. 일차적으로는 생활에서 겪게 될 불편함이다. 나는 집돌이기는 해도 가끔 밖에 나가 활동성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처럼 비교적 장애에 대한 배려가 그렇게 크지 못한 상황을 보면 더 걱정스럽다. 지금의 내 눈에도 장애인분들에게 불편할 것 같은 시설들이 많은데, 내가 이를 직접 경험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모든 생물은 적응하기 마련이며 나도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다른 장애인분들이 살아가듯이 나도 살아가는 방법을 찾겠지. 하지만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삶, 당연하게 여기는 건강을 상실한 삶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은 두려운 일 같다.


두 번째는 타인의 시선이다. 다른 시선이 아닌 ‘동정’의 시선.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본인들의 우월함에서야 나올 수 있는 그런 시선. 나는 애초에 남들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가끔은 외적으로 사람을 지레짐작할 때도 있지만, 사람을 어떤 외형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겠지만, 남들보다는 덜 한 것 같다. 다만 동정의 시선은 받고 싶지 않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프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을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느 웹툰에서인가 봤던 대사가 있다.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은 저 시선들’ 그런 동정 섞인 시선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더욱이 타인에게 의지하면서 폐를 끼치는 것 또한 두렵다. 물론 간병이나 보조를 해주는 소중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민폐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작은누나가 큰 수술을 하면서 간병을 위해, 장기간 병원에 머물렀던 때가 있다. 그때 누나의 수발을 들고 간병을 했던 것은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며, 어떤 보상심리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누나가 건강해지기만을 바랐고, 오히려 더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누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했다는 것에 괴로워했던 것 같다. 나 또한 그것이 무섭다. 아무리 나를 사랑으로 당연하게 돌봐준다고 할지라도, 받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너무 미안한 일이다. 더욱이 내가 아프면 내 가족들이 슬퍼한다. 나는 그런 마음의 짐을 주고 싶지 않다.


실은 내가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만약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아프게 된다면. 나의 괴로움과 고통은 내가 어떻게든 참아보고 극복하겠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아픈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으며, 할 수 있는 거라곤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우며,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살아가면서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런 모습을 볼 수밖에 없겠지. 최대한 오랫동안 내 주변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같은 의미에서 내가 아프다면,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에게 그런 걱정을 끼치게 되는 것이겠지.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주신 몸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 나는 그렇게 건강을 챙기기 위해 운동을 간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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