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의 창조
문화(文化)란 인간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성취한 물질적, 혹은 정신적인 무언가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는 그 문화를 향유하는 사회가 직면한 대내외적 환경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역시 환경에 따라 지난 수십 년간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현대의 젊은 세대는 100년 전 조상들의 생활상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른바 ‘전통문화’의 보존과 체험 및 소개가 강조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현대의 환경에 전혀 맞지 않은, 그리고 통상 과거의 것으로 여겨지는 ‘전통문화’는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 가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문화는 현대인들의 일상과 괴리되어 있는 과거의 문화로 흔히 이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문화는 현대인들의 몸과 정신에 ‘체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체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전통문화는 대부분 국가권력에 의해 전통문화로서의 지위와 가치를 ‘승인’ 받으며, 박물관이나 전통문화 체험장 등 지정된 장소에서 ‘전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전시는 해당 사물이나 행위를 ‘전통’으로 위치시키기 위한 일종의 의례로서 기능한다. 전시된 전통문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자국민에게 긍지와 민족의식을 심어주며, 외국인에게는 이질적인 문화를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문화’들은 과거에는 ‘전통’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거나 특정 집단에 의해서만 향유되는 문화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사물이나 행위에 ‘전통’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통으로 규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한국에서 이러한 과정은 20세기 초반의 일제 식민지배 시기와 196~70년대 군부정권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전통문화의 창조는 민족의식 형성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 속으로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들을 ‘전통’으로 위치시킬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아는 아리랑은 잡가 계열의 ‘신민요’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서 1920년대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후 ‘한민족의 한(恨)’을 대표하는 민요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1920년대 말, “진취적이며 단체적이고도 조선적 정조를 강조하는 노래”를 규정하고 이를 널리 퍼뜨리려고 했던 ‘조선가요협회’의 ‘유행가곡 개량운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일제 치하의 상황에서 조선 민족의 단결을 촉구하고 일치된 민족적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아리랑이라는 유행가가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전통 민요’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슬픈 정조’를 대변하는, 즉 한민족의 감성 그 자체와 일치된 ‘민족의 노래’로서 규정되고, 항일 정신을 내포한 노래로 채색되어갔다. 아리랑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는 기사와, 많은 항일 단체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해산했다는 일화는 민중들이 아리랑을 민족적 저항의 표상으로서 ‘요청’하고 ‘수행’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전통문화의 창조는 조선 문화의 소유권을 둘러싼 ‘문화권력’ 담론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일본은 창경궁에 위치한 ‘이왕가박물관’을 통해 조선 문화의 ‘보호자’로서 조선 지배의 문화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박물관은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지배 민족이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보호’함으로써 그 문화를 ‘전유’할 권리를 획득해왔던 것이다. 이왕가박물관의 주요 전시품은 ‘고려청자’였다. 일본의 예술인들은 고려청자에 높은 미적 가치를 부여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조선시대의 미술을 폄하함으로써 조선의 문화적 쇠락을 강조했다. 조선 문화의 쇠락은 조선의 멸망과 일본에 의한 조선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국가가 쇠퇴할수록 문예 미술공예품도 쇠퇴해가며, 일본이 조선이라는 국가를 대체하여 조선의 미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선인 사이에서도 조선의 ‘전통’ 미술공예품을 확보하여 조선 미술품을 일본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경성의 최고 갑부였던 간송 전형필은 1930년부터 조선의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사설 미술관인 ‘보화각’을 개관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조선 미술품을 조선인이 소유함으로써 민족문화를 보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민족문화 만들기가 한창이던 192~30년대 무렵, 한편으로는 대중문화의 ‘양반화’가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확고하게 형성된 16세기 이후 양반들은 자신들을 하층민들과 차별하기 위한 고급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신분제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양반과 그들의 문화를 모방하려는 이른바 ‘양반열’ 현상이 나타났다. 하층민들은 양반의 유교적 관습이나 복식, 의례, 도덕 등을 학습하여 대중문화의 형태를 변화시켜갔다. 이러한 현상은 근대화 자본의 물결이 한반도 곳곳으로 침투하던 식민지 시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봉건적 신분질서의 해체와 양반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신식 문물과 근대화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에 가까웠다. 일제에 의해 강압된 근대화와 외래문화의 도입은 조선의 농민들과 지역 양반들에게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새로운 것’에 맞서 ‘오래된 것’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신식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가져온 일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지방의 핵심 양반 세력은 문집을 발간하거나 문중사우 건립에 힘을 쏟아 자신들의 전통적 권위를 강화하려 했으며, 지방민들을 자신들의 문화코드 안으로 포섭하기 위해 이러한 권위들을 이용했다. 농민들은 양반들의 유교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그것을 내면화함으로써 민중문화와 양반문화가 결합된 농민적 ‘전통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에서 형성된 이른바 ‘조선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적 전통문화’로서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갖기 위해서는 196~70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기존의 마을공동체와 봉건적 신분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정부의 의도에 의해 ‘국민’이라는 새로운 공동체 속으로 포섭되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국민국가’ 창설을 위해 ‘민족적 전통문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고, 그 결과 일부의 선택된 문화 요소들은 ‘한국의 전통’으로 규정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박슬기, 「민족의 노래로서의 아리랑, 발명과 수행 - 아리랑과 조선 민요 담론」, <<비교한국학>> Vol 20, 2012.
박소현, 「‘고려자기’는 어떻게 ‘미술’이 되었나 – 식민지시대 ‘고려자기열광’과 이왕가박물관의 정치학」, <<사회연구>> Vol 1, 2006.
이용기, 「식민지기 농촌 지역사회의 중첩된 시간 – ‘전통적인 것’의 향방과 함의」, <<대동문화연구>> Vol 96, 2016.